피플 위드 코브프라

손끝의 움직임으로
보이지 않는 맛까지 표현하다

푸드스타일리스트 ‘초록찬장 스튜디오’ 고영옥 대표

KoBPRA WEBZINE vol.88  글.  이한빛  

흔한 식사 장면 속에 놓인 '음식'이 누군가에게는 드라마 속 소품 중 하나일지 몰라도 푸드스타일리스트에겐 맛은 기본이고 모양과 멋, 분위기 하나까지 흐트러짐 없이 완벽을 담아내며 조화로움을 더한 작업물이다. 사전 준비부터 촬영 세팅까지 숨 쉴 틈 없이 움직이느라 스스로를 물밑에서 더 바쁘게 발을 젓는 오리라고 표현하지만 우아하고 미세한 손끝의 움직임으로 보는 이들의 오감을 자극하는 초록찬장 스튜디오의 대표이자 푸드스타일리스트 고영옥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초록찬장스튜디오를 운영하는 22년 차 푸드스타일리스트 고영옥입니다. 광고나 지면촬영, 전시 등 여러 방면에서 푸드스타일링을 하고 있지만 드라마를 많이 하게 되면서 ‘드라마 푸드스타일리스트’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푸드 스타일링은 맛있게 표현하기입니다. 맛도 중요하지만, 공간의 조화, 음식의 색, 음식과 관련하여 삶의 질을 향상하고자 색채를 전공하였고, 활용해 나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새로운 일을 찾고자 고민하던 시기에 TV지역광고에서 푸드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을 소개하는 것을 보게 됐고, 저의 성향과 잘 맞는 일이지 않을까 해서 시작하게 된 게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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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보이는 건 얼마 안 되어 보여도 혼자 하기 힘든 작업 같습니다. 화면에 맛있게 담기는 게 우선이라 음식점에서 플레이팅 하는 것과는 기준이 다를 것 같아요.
혼자 하는 작업도 있지만 주로 팀을 이뤄 작업을 합니다. 제 직업을 비유할 때, 백조나 오리에 비유합니다. 물 위에서는 우아하고 예뻐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바쁘게 발을 저어야 한다고요. 준비 작업 때문에 촬영장에 제일 먼저 도착하고 뒷정리 때문에 촬영이 끝나고 가는 경우가 많아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플레이팅은 대본의 내용과 등장인물 수에 따라 달라집니다. 음식점에서는 음식이 맛있게 보여야 하지만, 드라마에선 연기자들의 연기와 분위기에 보조하는 작업이라 조화가 더 중요시 여겨지죠. 내용의 분위기와 상황에 따라 전체적인 색깔과 맛, 형태, 화면에 보일 형태, 양을 맞추어 세팅하는데 장보기를 비롯해 꽃, 그 외 소품 준비에만 평균적으로는 이틀 정도 걸리고 파티 장면 같은 경우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반면에 준비한 작업에 비해 화면 노출이 짧아 아쉽기도 해요.
카메라에 어떻게 보일지도 중요하지만, 연기자들이 음식을 먹는 장면도 있기 때문에 맛 역시 소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준비하는 음식의 양도 어마어마할 것 같은데, 보통 얼마나 준비해 가시나요?
음식이 정말 맛있어야 연기자의 연기가 맛있게 나올 거라 생각해서 신경 써서 만듭니다. 양이 많을 경우에는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기 위해 연출팀과 미리 상의하고, 연기자가 먹는 경우에는 등장 인원수에 맞춰 기본 5~10인분으로 준비해 갑니다. 간혹 준비를 많이 했는데 음식이 남으면 스태프들에게 한 입씩 나눠줍니다.
넉넉히 준비해 가도 촬영장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때도 많죠?
드라마 <궁>을 찍을 때, 신채경의 집에서 가족들이 삼겹살과 김치찌개 먹는 장면이었어요. 감독님이 자연스럽게 먹으며 연기하라고 하셨는데 연기자들이 김치찌개와 삼겹살이 맛있다고 너무 먹어서 김치찌개는 계속 끓여 보충하고, 삼겹살과 상추가 모자라서 제작팀까지 동원되어 사러 나갔어요. 결국 잠시 촬영이 중단돼서 안절부절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식샤를 합시다> 때는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는 장면에서 충분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먹는 촬영이 계속돼서 저희도 끊임없이 음식을 만들어야 했어요. 하지만 양이 아슬아슬 모자라는 비상사태가 터지고 말았죠. 하필 늦은 밤이었고, 세트장만 있는 곳이라 소품팀장이 부랴부랴 인근 시내로 나가 짜장면을 구해 보겠다고 나가고... 식은땀이 절로 났던 기억이 있어요. 다행히 무사히 끝났지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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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샤를 합시다> 촬영 장면




준비한 시간에 비해 방송 분량이 짧으면 아쉬울 것 같아요.

<꽃보다 남자>와 <심야식당>이 그랬어요. <꽃보다 남자>는 화려한 요리와 세팅이 많아서 매번 밤을 새우며 준비를 많이 했는데, 화면에 음식이 보이지 않거나, 없어지거나, 잘려서 나오면 너무 속상했어요. 당시에 쪽대본으로 촬영하느라 촬영 시간이며 편집 시간도 모자라서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심야식당>은 제작 때부터 참여해서 준비했는데 제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던 작품이라 가장 아쉬웠습니다.

<식샤를 합시다 1,2>, <심야식당> 등 음식이 주제인 드라마도 여럿 담당하셨습니다. 보통의 드라마와는 다른 점은 무엇이었나요? 또한 음식이 돋보였던 <철인왕후>처럼 사극의 경우 고증도 무시 못 할 것 같아요.
보통 드라마에선 어떤 음식인지 중요하지 않은, 그저 연기자 앞에 놓인 소품 중 하나지만 음식이 주인 드라마는 음식에 이름이 있어서 연기자와 같은 주인공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음식은 타이밍이 중요하기 때문에 윤기가 흐르고 맛있어 보이려면 연기자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을 때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죠. 화면에 보이는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뜨거워서 부풀어있는 달걀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치국수처럼 갓 나온 음식의 모양과 느낌은 잠깐 유지되기 때문에 서둘러 촬영하고 OK 될 때까지 계속 같은 모양과 형태로 만들어요.
퓨전사극이었던 <철인왕후>는 드라마 배경이 조선시대와 현대가 혼합된 내용이라 감독님과 상의 후 고증을 기반으로 기본 세팅은 시대적 상차림과 소품을 가져가고 음식 내용과 세팅 등은 현대의 음식과 재료, 플레이팅을 섞어서 만들었습니다.
음식과 플레이팅 방식에도 유행이 있는 만큼 계속해서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것 같은데 요즘엔 어떤 쪽에 관심이 가세요?
음식도 더 다양하게 진화했고, 플레이팅도 예전에는 풍성하게 세팅했는데 요즘에는 간결하고 디자인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하고 있어요. 요즘은 분자요리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철인왕후>를 보면 ‘머랭 소고기국밥’이라고 나름의 분자요리가 나오거든요. 전통 국밥 위에 달걀흰자 거품을 올리는 장면인데 마침 연기자가 거품기로 머랭 치는 장면이 있어서 그대로 직접 올리게 했어요.
푸드 스타일링도 일종의 예술이고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대표님 작품관에 가장 영향을 끼친 작품은 무엇인가요?
푸드 스타일링은 공간과 색채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고, 공간을 꾸미고 그 안에 인물이 있고 접시 안에 형태와 맛을 넣어주는 종합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미술, 공예, 소품, 식기 등의 전시를 보며 저의 스타일에 참고하는 편이죠. 강의 때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프랑스영화 <바베뜨의 만찬>인데요, 여자 궁중요리사가 전 재산인 복권당첨금으로 산해진미를 준비하여 진심을 담아 요리하고, 요리를 먹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푸드스타일링은 음식으로 즐거움을 주는 일이라 작업하는 내내 저도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많은 작품에 참여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또는 작품이나 연기자와 있었던 재밌는 에피소드도 궁금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궁>과 <철인왕후>입니다. <궁>은 미니시리즈 드라마에 속해 작업 한 드라마여서 저에게 의미가 있는데요, 차 마시는 장면이 많아서 디저트가 많았죠. 김혜자 배우는 화면에 노출이 잘 안되는 거 같아 안타깝다며 일부러 디저트 접시를 높이 올려 화면에 보이게끔 연기해주셔서 지금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최근엔 같이 작업했던 주지훈 배우를 촬영장에서 다시 만났는데 반갑기도 하고 세월의 깊이도 느껴졌어요. <철인왕후>에서는 수라상 촬영이 끝났을 때 다들 맛이 궁금했나봐요. 상 앞에 나란히 둘러앉은 감독님, 연기자들 입에 제가 음식을 하나씩 입에 넣어 드렸던 일도 기억나고, 특히 신혜선 배우가 장조림이 맛있다며 싸달라고 했던 일 등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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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작업은 무엇인지,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과 함께 마지막 인사도 부탁드립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정년퇴직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심하다가 첫발을 들이게 됐고,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며 왔어요. 왜 이렇게 힘들게 하냐고, 대충 기성품 사다가 하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한 하려고 합니다. 작업이 끝나면 시원함과 섭섭함이 함께 남아요. 때로는 실수도 보이고, 이렇게 할 걸 하고 아쉬움도 있지만 누군가가 좋았다고, 수고했다고 하면 보람도 있어서 ‘다음 작품에는 이렇게 해야지!’ 하며, 또, 새로운 작품을 기다리고 있죠. 계속해서 음식을 주제로 한 드라마나 영화작업을 하고 싶어요, 나아가서 K-Culture 중 하나인 한식 콘텐츠로 발전시켜서 해외 진출도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