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정 영화감독
KoBPRA WEBZINE WRITE.S vol.78
영화감독들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지금 어느 방송국에서 네 영화 틀어준다. 돈 들어오면 밥이나 사라.’ ‘내가 이번에 어느 콘텐츠 플랫폼에 가입했는데 네 영화가 있어서 일부러 여러 번 플레이했다. 저작권료 받으면 내 덕도 있다는 거 잊지 마라.’
모르고 하는 말이고, 응원의 의미로 하는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이 시리다. 내 영화를 어디에서 누가 보건 저작권료 같은 건 통장에 꽂히지 않는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한국의 영화감독 누구도 저작권료를 받지 못한다.(이 문장은 2021년부터 일부 사실이 아니게 됐다. 후에 설명하겠다.)
왜 나의 친구들은, 영화를 사랑하는 대중들은, 방송이나 플랫폼에서 영화를 볼 때마다 영화감독에게 모종의 저작권료가 지급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마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거다.
우리가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음악을 한 번씩 들을 때마다 저작권료가 지급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방송 프로그램에서 음악을 한 번씩 사용할 때마다 저작권료가 지급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영화는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데뷔작 계약서를 받아보기 전까지는 나 역시 영화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저작권료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 했다. 영화를 전공하고 연출부 일을 시작해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도 내 친구들처럼 복제와 전송이 가능한 모든 창작물의 창작자는 창작물이 소비될 때마다 당연히 저작권료를 받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받은 그 계약서에는, 4년 동안 열 두 번도 넘게 시나리오를 고치고 고쳐 투자에까지 다다른 내 영화에 대한 저작권을 전부 제작사에 양도한다고 써 있었다. 우리 회사만 특별한 게 아니라 ‘원래’ 그런 것이고, 그 이유는 영화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저작권료를 달라고 나서거나 유통 과정에서 매번 허락을 맡으라고 요구하면 비즈니스를 할 수가 없어서라고 했다.
멀쩡히 사업 잘 하고 있는 음악계나 재방료 지급하지만 망하지 않는 방송국들을 생각하면 남득할 수 없는 이유였지만, ‘원래’ 그렇다는데, 나 같은 신인감독 아니라 대한민국 영화감독 그 누구도 못 받는다는데, 저작권료를 받을 수 있게 계약서를 수정해 달라는 요청은 할 수 없었다.
설사 계약을 수정한다고 한들 저작권료를 모아서 나눠주는 단체도 없는데 내가 직접 저작권료를 받으러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조리했지만 받아들였다. 그저 그 때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매우 부끄러웠을 뿐이었다.
이미 법적 보호을 받는 유럽과 남미, 한국에 저작권료를 전달하지 못하는 속내 나의 무지에 대한 더 큰 깨달음은 몇 년 뒤에 찾아왔다. 2019년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작가감독연대(AAPA) 발족 회의에 DGK(한국영화감독조합)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을 때였다.
그 곳에서 알게 된 사실은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영상물의 창작자들이 법적 보호를 통해 저작권료를 받고 있었고, 아르헨티나, 칠레, 콜럼비아 등의 남미 국가에서도 2000년대 이후로 법 개정이 이루어져 영상물 창작자들이 저작권료를 받는 제도가 정착돼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런 국가들에서는 자국에서 이용되는 모든 영상물에 대한 저작권료를 모아 두기 때문에 한국 작품들에 대한 저작권료 역시 모아두고 있었지만 한국 작가/감독들의 권리를 대변하여 저작권료를 분배할 단체가 없어서 최근 몇 년 것을 제외하고는 문화 기금 등으로 종속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전세계 4위의 매출 규모를 가진 영화 시장인 한국에 영상저작물에 대한 공정한 보상(Fair Remuneration)을 보장하는 법률이 없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했다. 이것은 창작자의 기본권이라고.
저작권료의 안정적 보장을 위한 법률적 내용 현행법이 미진하다면 법률 개정 운동을 통해 반드시 얻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창작자들이 안정적으로 저작권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법률이 갖춰야 할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했다.
1 __ 감독과 작가가 영상물의 저작자라는 것을 명시할 것. (누가 저작자인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 권리자를 특정하지 못하여 제도를 시행할 수 없다는 핑계로 이용되기 때문에.) 2 __ 영상물 창작자에게 주어지는 기본권으로서 ‘포기할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는’ ‘공정한 보상(Fair Remuneration)의 권리’를 명시할 것. (창작자들은 계약관계상 취약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저작재산권 중 ‘공정한 보상’만큼은 자의에 의해서도 양도할 수 없는 것으로 지정하여 보호.) 3 __ 저작권 집중관리단체 (CMO: Collective Management Organization)가 권리자를 대리하여 저작권료를 수집, 분배해야 함을 명시할 것. (개인 창작자들이 방송국이나 플랫폼을 상대로 저작권료를 받으러 다닐 수는 없기 때문에.)
도쿄에서 만난 해외의 작가/감독 단체들은 그 동안 내가 이해는 안 가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겼던 영상물 저작권과 관련된 관행들을 반드시 바꿔내야 하는 이유와 방법, 그리고 스스로 입법 캠페인을 통해 제도를 도입했던 경험을 우리에게 가감 없이 일러줬다.
그리고, 디지털 플랫폼들은 영상물 시장을 글로벌 영역으로 통합할 것이고 이후로는 우리의 작품이 전세계 어느곳에서 어떤 생명력을 가지고 이용될지 모르는데 용역 계약과 한시적인 인센티브만 허용하는 기존의 계약 방식은 창작자의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할 것이라 했다. 한 마디로, 이것은 지체할 수 없는 시급한 문제라는 것이 그들 조언의 핵심이었다.
2021년, 17명의 감독들이 처음으로 프랑스로부터 저작권료 분배받아 그 회의를 기점으로 DGK가 저작권위원회를 발족하고 조합원들을 대리하여 해외에 잠자고 있는 한국 영상물 작가, 감독들의 저작권료를 찾아오기 위한 활동을 시작한 지 만 3년이 되지 않았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2021년 초에 처음으로 프랑스의 SACD로부터 17명의 감독, 작가들이 저작권료를 분배 받았다. 곧 프랑스의 SCAM(다큐멘터리 전문), 아르헨티나의 DAC, 스페인의 DAMA로부터 저작권료를 정산받으면, 그 수혜를 받는 작가, 감독들이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나라에는 영상창작자의 공정한 보상을 보장하는 저작권법이 없기 때문에 정작 우리 나라에서는 저작권료를 받을 수 없는 데다, 상대 국가의 창작자들에게 분배해 줄 저작권료가 없기 때문에, 이런 경우 우리가 받아올 수 있는 저작권료의 종류도 제한되어 그 규모가 상대적으로 매우 작을 수 밖에 없다.
그 사이 <기생충>은 오스카를 휩쓸었고, <오징어 게임>이 전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다. 유통이 통합된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작품들의 생명력을 감히 미리 재단해서는 안 된다.
사진출처: 넷플릭스
이 와중에 <오징어 게임>과 똑같이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된 스페인의 <종이의 집> 작가와 감독은 작품의 이용량에 비례하는 저작권료를 이미 받고 있다. 글로벌 사업체가 악덕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법이 후진적이라서 우리 창작자들이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와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자국의 창작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등한시한 것을 반성하거나, 시장의 변화에 늑장 대응했기 때문에 생긴 입법 공백을 개선할 노력은 하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글로벌 기업을 배척하거나 국내 기업에 왜 저런 거 못 만드냐고 질책하는 헛발질들만 하고 있다.
정부는 지금 당장 세계 영상저작권 시장의 규모를 파악하고 국내 저작권 시장 활성화를 위한 정책 도입 및 입법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정치인들은 입으로만 K콘텐츠 자긍심 운운할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문화적 성취에 가려진 후진적인 영상 저작권 제도를 개선하여야 할 것이다.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는 지금,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이윤정
영화감독
서울에서 영화도 만들고 아이도 키운다.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미국 CalArts 대학원에서 Film&Video 전공으로 MFA를 받았다. 2016년 <나를 잊지 말아요>의 각본/ 감독으로 데뷔하였고, 2020년 SF8 시리즈 중 <우주인 조안>의 각본/감독을 맡았다. DGK(한국영화감독조합) 저작권위원회에서 영상물 창작자들의 저작권 보호를 위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현 DGK 부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