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왕이었다.그전에는 치매 걸린 노인이었고 또 어느 때인가는 야동을 숨어 보는 능글맞은 노인이었다.그는 강도였고, 완고하고 고집 센 남편이었으며,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였다.65년 동안 수백 명이 그의 표정, 그의 눈빛, 그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과 만났다. 배우의 힘은 대단했다. 녹색과 갈색, 회색빛이 오묘하게 감도는 그의 눈빛에 수십, 수백 명의 인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배우의 아우라에 압도되는 순간이었다.
사진출처: 파크컴퍼니
순간 그의 목소리가 깊어지고 눈에 광채가 돌았다. 줄곧 온화하던 그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배우 이순재가 잠시 리어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목 뒤가 쭈뼛해지고 팔에 털들이 일어났다. 그 방에 나타난 리어왕은 대사 한 마디로 우리 모두를 압도하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배우 이순재로 돌아갔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한 수사물 드라마에서 악역만 33번 맡았다던 그의 말이 맴돌았다.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던 악하고 보잘것없는 역을 맡아 최선을 다했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본이 찢기고 무참히 야단맞아가며 첫 무대에 올라갔을 어린 배우의 모습부터 3시간이 넘는 대작 무대에 단단히 선 노배우의 모습이 그려졌다. 연기라고 하는 단단한 수면을 65년간 부딪치고 또 부딪치며 무수히 좌절하고 무수히 비상했던 배우 이순재는 또다시 수면에 닿으라고 말한다. 그래야 비상할 수 있다고. 그래야 날아오를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