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in KoBPRA

배우
이순재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왕이었다.
그전에는 치매 걸린 노인이었고
또 어느 때인가는 야동을 숨어 보는 능글맞은 노인이었다.
그는 강도였고, 완고하고 고집 센 남편이었으며,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였다.
65년 동안 수백 명이 그의 표정,
그의 눈빛, 그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과 만났다.
배우의 힘은 대단했다.
녹색과 갈색, 회색빛이 오묘하게 감도는 그의 눈빛에
수십, 수백 명의 인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배우의 아우라에 압도되는 순간이었다.

 INTERVIEWER 박여진   PHOTO 백홍기

“ 아직도 리어왕 대사가
계속 맴돌아요.
꿈에도 그 대사가 나오고요. ”

최근 연극 <리어왕>을 성황리에 마치셨습니다. 전석 매진, 3시간 20분의 상영 시간, 최고령 리어왕 등 많은 기록을 남기며 연극을 마치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꼭 해보고 싶었어요. 변형되지 않은 원작 그대로의 작품을요. 셰익스피어 작품의 진가는 원작에 완벽히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작으로 작품을 해보고 싶었지요.
젊을 때는 로미오를, 중년의 나이에는 오셀로와 맥배스 역할이 어울리죠. 지금 노년의 내게 어울리는 역할은 리어왕밖에 없어요.

언젠가 그런 생각을 지나가는 말로 한 적이 있었죠. 성사되리라는 기대 없이 했던 말인데 어쩌다 보니 정말 리어왕 무대에 오르게 되었네요.

사진출처: 파크컴퍼니



상영 시간이 3시간을 훌쩍 넘기는 작품이에요. 어떻게 보면 만용을 좀 부린 거죠. 주변에서도 걱정들을 많이 하더군요. 저러다가 노배우가 쓰러지는 건 아닌가 하고요. (웃음)
저 자신도 실수하지 않을까 슬며시 걱정도 되더군요. 한 네 달가량 준비하면서 여러 책을 보며 공부했어요. 또 좋은 번역가를 만나 원작 중심의 좋은 대본을 만날 수 있었고요.

지금으로써는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이 듭니다. 관객 호응도 예상보다 좋았고요. 물론 개인적으로 확신은 있었어요. 원작에 중요한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으니까요. 그런 원작을 충분히 존중하면 잘 되리라는 확신은 있었지요.

작품을 끝내고 나면 배우들이 겪는 특유의 진통이 있다던데, 어떠셨나요? 잘 쉬셨나요.
무대 끝내고는 특별히 힘들다거나 하진 않았는데 백신 3차 추가 접종을 하고는 평소보다 좀 피로감을 느꼈어요. 크게 아프지는 않았고요. 별다른 휴식 방법은 없고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정형외과에서 마사지 비슷한 치료를 받았어요.

작품을 마친 후 진통이랄 건 없고, 여운이 좀 있죠. 작품을 끝내고 나면 대사가 계속 맴돌아요. 꿈에서도 그 대사가 나오고요. 다만, 작품을 마친 후에도 해야 할 일들이 잔뜩 쌓여 있다 보니 그런 여운이 길지는 않아요.


“웃지 못해
무대에서 쫓겨날 뻔했던 시절 ”

선생님의 첫 무대도 연극이었죠. 극단 떼아뜨리브의 <지평선 넘어>로 데뷔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리어왕이 된 이순재가 첫 무대에 오른 캡틴 스코트 이순재를 만난다면 어떤 감정이 들까요? 처음 배우가 되셨던 시절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캡틴 스코트를 본다면, ‘지금이라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겠죠. 당시엔 고생을 많이 했어요. 처음 무대였거든요.

당시 연출을 맡았던 전조영 선생은 사실주의 연기를 중시하던 분이었어요. 내가 맡은 캡틴 스코트는 1막 2장에 처음 등장하는데, 호쾌하게 웃으며 장면을 시작해야 했어요.

그런데 처음이다 보니 그 웃는 연기가 잘 안되더라고요. 웃는 연기 못한다고 야단도 많이 맞았지요. 그러다가 조연출이 대본도 찢고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연습도 중단되었죠.

연습실에서 나와서 동숭동에 있는 빈 강의실에서 종일 연습을 했어요. 혼자 떠들고 웃고 하다 보니 호흡이나 발성이 조금 나아지더라고요. 다음날 가서 보니 조연출이 찢어진 대본을 다시 붙여놨더라고요. (웃음)
그렇게 연습이 다시 시작되었고 무대를 마치고 나니 뭐 잘했다고 그러더군요. 그렇게 해서 계속 연기를 하게 되었어요.

이후 3학년 여름 방학 때, 서울대 연극회에서 이해랑 선생님을 만났어요. 이해랑 선생님이 연기 지도를 해주셨죠. 당시엔 서울대 연극회는 예산이 거의 없었는데 4학년 때 학생회 대의원을 맡게 되면서 예산심의에 참여할 권한이 생겼어요. 그래서 극회에 예산을 편성해 본격적으로 합숙도 하며 연습을 했죠. 우리나라에는 소개되지 않았던 작품들을 초연으로 상영하기도 했어요. <윈슬로우 소년>도 그중 하나였죠.

당시엔 매년 대학 연극 경진대회도 열렸는데 연극학과가 있는 학교가 없었어요. 다들 동아리에서 연극을 출품하고 그랬죠. 그러다가 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중앙대, 한양대, 동국대 등에 연극영화과를 만들면서 대학에도 연기 관련 학과가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조병화 시인, 황순원 소설가,
안병욱 철학자가 스승이었던 시절”

문학 작품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연기와 문학은 어쩌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문학 감수성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고등학교 시절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어요. 황순원 소설가도 있었고 안병욱 철학자도 있었어요. 조병화 시인도 있었지요. 조병화 시인은 수학을, 안병욱 철학가는 영어를 가르쳤어요.

특히 수학 교사였던 조병화 시인은 우리에게 수업 외적인 부분에서도 많은 영감과 감동을 주신 분이죠. 주관식으로 문제를 냈는데 문항별로 점수 배점이 달랐어요.

한번은 학생이 답을 맞췄는데 점수에 반영되지 않았다며 항의하자 ‘답은 맞았지만 과정이 틀렸다’며 점수를 주지 않은 적도 있었지요.

문학과 연기 이야기를 더 듣고 싶습니다. 특히 안톤 체호프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사실 우리 시절에는 체호프가 러시아 문학가여서 많이 접할 수는 없었지요. 하지만 체호프는 정말 대단한 작가예요. <갈매기>나 <벚꽃 동산> 등은 체제의 붕괴를 이야기하는 작품이에요. 멜로 드라마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면 대사가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혁명과 체제의 붕괴를 놀라운 통찰력으로 들여다보고 작품으로 만든 작가죠. 정말 깊은 작품이죠.

셰익스피어도 마찬가지예요. <리어왕>도 단순한 광기가 아닌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한 작품이죠. 리어왕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순간 그의 목소리가 깊어지고
눈에 광채가 돌았다.
줄곧 온화하던 그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내가 그대들의 입장에 너무 무관심했구나. 부자들이여 가난한 자의 고통을 몸소 겪어 봐라. 넘치는 것들을 그대로 나누고 하늘의 정의를 실천하자.”

배우 이순재가
잠시 리어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목 뒤가 쭈뼛해지고 팔에 털들이 일어났다.
그 방에 나타난 리어왕은
대사 한 마디로 우리 모두를 압도하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배우 이순재로 돌아갔다.

이런 문학적 표현에는 깊은 사상이 담겨 있지요. 원전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죠. 올리비에 로렌스 감독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며,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다.”

하지만 가끔 연극 무대에 배우보다 무대 장치나 다른 것들을 중시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특히 체호프나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변형된 작품을 보면 보석 같은 작품이 훼손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이런 작품은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어요. 아무리 변형해도 원전보다 더 나은 작품이 나오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가난하고 대접도 변변찮은 이 일을
왜 시작했냐고요?
‘그 맛’을 알아서예요.”

예전과 지금은 드라마 환경이 많이 바뀌었지요.
동아방송 라디오 드라마 녹음 시절 재미난 일화가 있어요. 당시 김벌래 음향 감독이 바로 내 옆에서 소리를 같이 녹음하던 시절이었죠. 내가 대사를 하면 그 옆에서 장면 효과음을 내고 그랬는데 그때 칼싸움 장면을 녹음하다가 실제 칼의 칼날이 빠지면서 사고가 날 뻔했던 적이 있었어요.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죠. 물론 지금은 제작 환경이 좋아져서 성우와 음향 녹음을 따로 합니다.

그러다가 방송가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어요. TBC에서 17년간 있었는데 MBC가 개국했어요. 그때 재능 있는 배우들이 그리로 많이 갔지요. 윤여정 배우도 마찬가지고요. 똑똑하고 재능 있는 배우였는데 주목받지 못하는 배역만 맡고 있었죠.

MBC 개국 소식을 듣고는 윤여정에게 그리로 넘어가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라고 했죠. 그랬더니 MBC로 가자마자 장희빈 역을 맡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지요. 이후 재능을 마음껏 펼쳤고 지금은 다들 아시다시피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지요. (웃음)

요즘 가장 달라진 점은 배우에 대한 대우겠죠. 예전에는 출연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배우들이 이젠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되었지요.

90년대 후반부터 연극, 영화에 인식이 좋아지고 수익성도 높아졌어요. 블록버스터 영화도 나오게 되었고요. 정재(이정재)나 병헌(이병헌)이도 영화에 나가면서부터 억대 출연료도 받고 광고 수익도 크게 생겼지요. 하지만 드라마는 영화에 비해 노동력 대비 수익성이 아직 낮아요. 미니시리즈 하나를 해도 몇 달 동안 찍어야 하니까요.
사실 TV 드라마는 가난한 연극쟁이들이 뛰어들면서 본격화된 거예요. 저만해도 50년대에 연극을 시작했는데 70년대에 처음 출연료라는 걸 받아봤어요. 78년도에 현대극장에서 상영한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첫 출연료를 받았어요.

예전에는 배우라는 직업이 사회적 인식도 낮고 경제 여건도 최하였죠. 그럼 이 가난하고 신분 낮은 이 직업을 왜 했냐고 묻는 이들도 있겠지요. 암기력 좋으니 마음 잡고 공부하면 관료나 교수도 될 수 있지 않냐고 묻는 사람도 있어요.

제가 이 직업을 한 이유는 ‘그 맛을 알아서예요.’ 그 맛을 알고 나니 어쩔 도리가 없더군요. 이 길을 가는 수밖에.

배우에 대한 인식이 좋아진 데에는 선생님 같은 배우들의 끝없는 노력도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해요. 특히 선생님은 교육에도 큰 관심을 두고 계시죠?
2011년도에 가천대에서 연기예술학과를 설립할 생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참여해서 그 학교에 연기예술학과가 생겼어요.

강의나 교육은 98년부터 줄곧 해오던 일이에요. 교육이 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몇 번이나 그만두려고도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계속하게 되더군요. 선생님은 적성에 맞지 않지만, 배우인 제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실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워크숍을 통한 수업을 하게 되었고요. 한 학기에 한 작품을 정해서 그 작품을 통째로 다 해보게 하는 거예요.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연기를 배우는 학생에게는 무척 중요한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장구벌레는
수면에 닿아야 비상한다”

바이러스 시대를 끝내지 못한 채 2022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 등 훨씬 더 가혹한 시대를 겪은 어른들의 조언과 위로를 듣고 싶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 때와 능력이 달라요. 쉽게 말하면 종족 개량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학습 능력도 좋아지고 습득 속도도 빨라졌어요. 하지만 속도가 전부는 아니에요. 장구벌레가 모기가 되려면 무조건 수면에 닿아야 해요. 물을 뚫고 나오지 않으면 날개를 달고 비상하지 못해요.

연기에 천재는 없어요. 물론 천재적인 아역배우들도 있긴 하지만 명아역이 명배우가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어요. 안성기는 드문 경우죠. 하지만 명아역이었던 안성기도 중학교 때 이후 모든 연기를 접고 있다가 어느 날 물을 뚫고 나와 새로운 모습, 새로운 연기를 보여주며 성공한 거예요. 아역 시절의 인기에 취해 있었다면 아마 성공하지 못했을 거예요.

많은 이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선생님이 이미 통과한 시간을 서툴고 힘들게 통과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이 있으신가요?
재능은 짧고 노력은 길어요. 한때 반짝 스타로 떠올랐다가 붕 뜬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거기서 정체되거나 멈춘 후배들도 수백 명이에요. 반면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통해 연기를 예술로 승화하는 배우도 있어요.

(故) 김지영 배우를 생각해보세요. 행인 1, 빨래터 아낙네 A 같은 단역을 맡았을 때 그 배우는 독특한 사투리며 연기를 연구해 무명의 행인, 빨래터 아낙네에 생명을 불어넣었어요. 연기를 통해 예술을 창조한 거죠.

코미디극 대본에 작가가 한번 웃음을 주라고 쓰면, 연출은 두 번 웃을 포인트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3번, 4번 웃음을 주는 것은 배우의 재능이에요. 여기에 연기 예술의 창조성이 있지요.

작품보다 못하는 배우, 작품만큼 하는 배우, 작품을 능가하는 배우가 있어요. 작품을 능가하는 배우가 되어야죠. 이건 배우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꼭 필요한 사람” 중에 꼭 필요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배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로 정체되면 안 돼요. 편안한 곳에 안주하면 안 돼요.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해요. 기회가 왔을 때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자기만의 창조성을 활짝 피워야 해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한 수사물 드라마에서 악역만 33번 맡았다던 그의 말이 맴돌았다.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던 악하고 보잘것없는 역을 맡아 최선을 다했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본이 찢기고 무참히 야단맞아가며 첫 무대에 올라갔을 어린 배우의 모습부터
3시간이 넘는 대작 무대에 단단히 선 노배우의 모습이 그려졌다.

연기라고 하는 단단한 수면을 65년간 부딪치고 또 부딪치며 무수히 좌절하고 무수히 비상했던 배우 이순재는 또다시 수면에 닿으라고 말한다.

그래야 비상할 수 있다고.
그래야 날아오를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