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즐겁게 잘 버티는 중입니다

걷고 또 걸으며 배우로 살아가는 이야기

차영남 배우/작가

KoBPRA WEBZINE WRITE.S vol.80 

배우이자 N잡러로서의 삶

나는 배우다. 아직 얼굴을 알리지 못한 소위 '무명배우'지만, 유명이든 무명이든 연기하는 삶을 살아간다. 많은 사람이 예상하지만 이 직업을 가진 사람 중 대부분은 생계유지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내게는 몇 개의 직업 타이틀이 더 있다. 배우이면서 글을 써 출판하는 작가이고 카페를 운영하는 카페지기다. 주말이면 연기를 가르치고 퇴근 후엔 육아와 살림도 빼먹지 않는다.

N잡러로서의 삶은 온전히 배우로서 살아가고 싶을 때마다 내 마음을 괴롭혔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모든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온갖 아르바이트에서 배운 크고 작은 기술들이 직업이 되고 수익이 되니 재미까지 더해졌다.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나로서는 실제로도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긍정적으로 여기기로 했다. 그래야만 다른 일을 하면서도 배우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


꿈꾸는 길을 위해 꿈꾸지 않은 길을 마주할 때

모든 배우 지망생들이 마찬가지겠지만 연기 열정의 크기와 상관없이 데뷔와 그 이후의 삶은 계획을 피해 갈 때가 많다. 연극학과에 진학해 차근차근 성실하게 배우의 길을 걸어갔지만 늘 그렇듯 현실은 생각과 많이 달랐다. 제대 후 심기일전 했지만, 상황은 더 녹록지 않았다. 연기를 하기 위해 늘 오디션과 에이전시 미팅을 해야 했고 매력적인 배우로 보이기 위해 관리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도전과 관리를 하려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돈 버는 데 할애해야 했다. 이런저런 독립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생계를 유지하기엔 수입이 턱없이 적었고 주위의 반응은 생계비보다 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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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쉽지 않다. 누구의 삶인들 그렇겠지만

언젠가 독립영화 캐스팅을 위해 만난 감독님과 가벼운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당시 내가 아르바이트 하던 카페에 들린 한 감독님이 "이렇게 일을 많이 하면서 연기는 언제 해요?”라며 툭 던지듯 물었다. 서운하고 억울했다. 다른 일로 돈을 벌어야만 연기를 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냈다. 이런 삶이 어떤지 내 입장이 되어 봐야 안다고.
대화는 짧았지만, 여운은 길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생계를 위한 일만 한다고 당장 풍족해지는 것도 아니고, 연기에 매진할 시간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생계를 위한 일에 얼마나 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평일 근무를 주말 근무로 바꿨다. 당연히 수입은 반토막도 안 되게 줄었지만,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그렇게 번 시간으로 부산국제영화제도 가고 그 영화제를 통해 잠시 주눅 들어 있던 열정도 회복했다.

우연히 들어온 광고 제안이 활력을 보탰다. 광고에 출연하면서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광고라는 매체 특성상 적은 시간을 투자하고 보수도 독립영화 열 편 이상의 수입을 안겨주었다. 무명 배우의 퍽퍽한 삶에 조금 숨구멍이 트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방송 이후 사람들이 보내는 즉각적이고 호의적인 피드백은 쪼그라들었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었다.

광고 수입은 조금이나마 안정적으로 연기 생활을 하는 데 큰 보탬이 되어 주었다. 생계가 안정되니 마음 놓고 드라마 단역이나 상업 영화에도 출연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본격적인 연기자로 현장에 나가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현장 환경도 십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거칠게 말을 내뱉는 스태프도 많이 사라졌다. 새벽부터 무작정 기다리게 하던 예전과 달리 단역 배우에게도 타임테이블을 보여주며 양해를 구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콜타임을 바로 전달해주는 현장이 늘어났다. 그런 대우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단역배우도 춤추게 한다. 기다림에 지쳐 빨리 해치워버리고 가야겠다는 기분보다는, 한 장면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내 역할을 잘 해내자는 의욕도 생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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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ENA


병장 심진우, 희망이라는 이름의 <신병>

누구에게나 각자의 사정이 있다. 누군가는 아픈 식구를 보살피며 배우를 꿈꾸기도 하고, 누군가는 어쩌다 한 번 배우로서 활동하는 생활에 의미를 두며 다른 직업을 갖고 살아가기도 한다. 결국 자신만의 방법으로 배우의 길을 걸어간다. 고단한 현실을 친구 삼더라도 계속 이 길을 걷고 싶다는 의지만 있다면 내 삶 안에서만큼은 빛나는 주연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무대와 카메라. 그리고 그 사이에서 만들어진 헤아릴 수 없는 겹겹의 시공간들은 한순간도 소멸하지 않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더러는 뜨거웠고 더러는 잔혹했던 그 무대에서 비켜서지 않고 버티어낸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그리고 나와 닮은 길을 걸어가는 '배우'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이도 그랬으면 좋겠다.

지난해 겨울 날씨만큼이나 매서웠던 삶의 어느 모퉁이를 돌아갈 즈음 만났던 ENA 드라마 <신병>의 '병장 심진우'역은 나에게 선물과 같은 기회였다. 이 작품으로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헛된 기대가 아니라,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촬영에 임하며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이라도 이런 희망을 만날 수 있다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묵묵히 이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말년 병장 심진우는 제대했다.
남은 후임들에게 남긴 대사는 마치 내 어깨를 토닥이며 건네는 위로처럼 돌아왔다.

"중간만 가라는 애들 말 믿지 말고 열심히 해라. 결국 다 돌아온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버티고 걸어가는 배우 차영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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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남

배우/작가 @chayoungnam

연기하고 글 쓰고 커피를 내립니다. 타인의 질타를 두려워하지만 스스로를 사랑하는 힘이 더 크기에 계속 살아갑니다. 자주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서서 움직이는 것이 유일한 재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