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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출연료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유민석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사무국 대리

KoBPRA WEBZINE WRITE.S vol.80

한국에 텔레비전 방송이 등장한 지 60년이 넘었음에도 방송출연료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나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에게 알려진 바는 한국에 방송산업이 태동할 당시 국내 방송사들이 일본의 방송 제작 시스템을 모방하면서 일본에서 사용하던 출연료 기준표를 국내 실정에 맞도록 고쳐 쓰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다. 그 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출연료 지급 체계에도 조금씩 변화가 있었지만, 연기자를 등급별로 구분하여 해당 등급에 맞는 출연료를 지급하는 기본적인 틀은 유지되어왔다.


국내 출연료 기준표는 성인 연기자를 6~18등급까지 구분해 10분당 기본 출연료를 차등적으로 책정한 뒤, 이를 기준으로 방송프로그램의 형식, 편성시간 등에 따른 금액을 촘촘하게 나누어 놓았다. 개별 연기자의 등급은 방송사가 매년 내부 심사를 거쳐 연기자의 경력, 역할 비중, 수상 내역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해왔다. 방송사가 특정 연기자의 출연료뿐 아니라 업계 출연료의 상한과 하한을 정했던 셈이다. 이와 같은 시스템은 방송사가 공채 연기자를 선발하고 방송프로그램을 자체 제작하면서 연기자와 전속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에 유지될 수 있었다.


등급별 출연료 기준표의 현재

연기자의 등급이 효력을 잃기 시작한 것은 방송사들이 자체 제작 비중을 줄이고 연기자와의 전속성을 지워나가면서부터다. 연기자들은 방송사보다 외주제작사와 출연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 과정에서 연기자가 스스로 등급을 해제하거나 등급과 무관하게 계약하는 빈도도 늘어갔다. 게다가 방송사의 공채 시스템 폐지와 방송콘텐츠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이 맞물려 다양한 경로로 방송시장에 유입되는 연기자의 수가 급증했는데, 이들에게 기존의 등급 체계를 적용하는 데는 한계가 뚜렷했다. 연기자의 등급을 결정하는 명확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라마가 수출을 통해 막대한 수익 상품으로 발돋움하면서 스타 연기자를 섭외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졌고, 이에 방송사업자들이 등급 출연료를 훌쩍 뛰어넘는 출연료를 지급하기 시작하여 출연료의 상한선을 깨뜨린 것도 등급제가 유명무실해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 방송 생태계의 이런 변화 속에서 등급계약이 줄어들고 자유계약이 늘어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드라마를 예로 들면, 이제는 무술연기자를 제외한 연기자 중에 등급별 출연료 기준표를 기반으로 출연료를 정하는 경우를 찾기 힘들어졌다.


물론 등급 출연료 기준표의 효력이 아주 상실되었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과거와 같은 위상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방송연기 노동시장에서 보편적인 출연료 수준을 가늠하는 테이블로 기능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노동조합이 매년 방송사들과 출연료 협상을 통해 출연료를 결정하고 그것이 업계 전반에 배포되기 때문에 제작비를 산정할 때나 재방송료를 계산할 때 주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된다.


등급별 출연료 기준표가 여전히 유효한 또 다른 지점은 어떤 금액의 출연료가 상대적으로 많고 적음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출연료 기준표가 관행적으로 업계에서 오랫동안 통용되어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준표 가장 아래에 있는 6등급 출연료는 곧 방송연기 노동시장의 최저출연료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6등급에 못 미치는 출연료는 상식 밖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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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기 노동시장에 최저출연료가 필요한 이유

업계 최저출연료 수준을 살펴보자. 2022년 현재 6등급 성인 연기자가 KBS 미니시리즈 70분 물에 출연했을 경우 받는 금액은 회당 497,070원이다. 타 방송사의 6등급 출연료도 이와 대동소이하다. 일일연속극이나 편성시간이 그보다 짧은 방송에 출연하면 금액은 더 낮아진다. 50만 원에 못 미치는 이 금액이 최저출연료로서 합리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올해 대한민국 2인 가구의 최저생계비는 1,956,051원이다. 6등급 연기자가 연기 활동으로 본인 외 가족 1인과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방송에 얼굴을 내비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이는 출연료 기준표에 따라 정상적으로 지급받았을 때 이야기다. 자유계약에서는 이 '시장의 최저출연료'가 무너진다. 등급을 벗어던진 연기자는 자유계약을 맺을 수 있으므로 언뜻 등급계약을 맺을 때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는 것 같지만, 불행히도 모두에게 행복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등급이 무의미해진 상황에서 제작사와 연기자는 그야말로 ‘자유롭게’ 계약을 맺는데, 역사적으로 시장경제 체제의 자유라는 것이 노동자에게 유리했던 적은 별로 없다.


일반적으로 노동시장에서 개별 노동자의 협상력은 미미하다. 수요자 우위의 방송연기 노동시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업계에서 회당 50만 원을 최저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더라도 개별 계약에 강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대부분 방송사업자가 유리한 방향으로 계약이 체결된다. 50만 원 이하의 금액으로 계약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여기에 연기자가 작품 출연을 위해 소요하는 비용을 계산에 넣으면 실질적으로 지급받는 출연료는 한 줌에 불과하다. 자유계약의 원칙이라는 명목 아래 벌어지는 일들이다.


이것이 최근 방송 최저출연료의 규범화 혹은 법제화 논의가 시작된 이유다. 그리고 여기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출연료 기준표의 개정 혹은 재정립이다. 물론 아직 논의 초기 단계이기에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 적정 금액을 산정하는 공식, 출연료 정산 단위, 연기자 간의 형평성 등을 고려하여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출연료 지급 체계를 만들려면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 방송산업 관계자들, 정부 부처와의 사회적 합의 과정을 별론으로 하더라도 말이다.


방송사업자들과의 협상을 통한 지속적 갱신
미국배우방송인노동조합 사례

여기에서 미국배우방송인노동조합(SAG-AFTRA)의 사례는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논의의 방향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SAG-AFTRA는 약 16만 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단체로 전 세계 영화 및 방송산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들은 3년에 한 번씩 방송사업자들과의 협상을 통해 조합원의 텔레비전 방송 출연료 기준표를 갱신한다.
출연료는 방송의 종류, 편성시간, 시리즈 분량에 따라 촬영일 혹은 출연 회차를 기준으로 세밀하게 구분되어 있다. 일반적인 연기자가 하루 촬영에 임했을 때 우리 돈 140만원 원 가량을 받는데, 특이한 점은 3일 계약이나 주간계약처럼 계약기간이 길어질 경우 할인가를 적용받는다. 제작사가 연기자를 오래 고용하면 그에 따른 혜택을 받는 것이다. 영화 제작 시에도 최저출연료가 정해져 있는데 전체 제작비 규모에 따라 최저출연료가 다르다. 2022년 기준 제작비 200만 달러 이상 작품의 최저출연료는 일당 1,082달러, 30만 달러 이하의 작품은 일당 216달러다. 장기계약 시 출연료가 할인되는 시스템도 방송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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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SAG-AFTRA 웹사이트





SAG-AFTRA의 시스템에서 보듯이 방송 최저출연료 제정에 관한 논의는 단지 비합리적인 출연료 지급 체계의 개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방송 제작 시스템, 제작 환경의 전반적인 체질 개선을 가져온다. 이것이 방송산업의 구조가 바뀌고 있는 시대의 흐름과 어떻게 조응할 수 있는지 살피는 것도 과제다. 이러한 커다란 변화 한가운데 방송출연료만 과거에 머무르게 내버려 두는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명분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지금의 출연료 지급 체계가 개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과연 우리 사회에 연기자가 연기 활동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마지노선에 대한 담론이 충분했는지 질문을 던져보면 된다. 물론 대답을 구하는 질문은 아니다. 


유민석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사무국 대리

한양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에디터로 일했다. 잡지사의 노무관리에 분노하여 노동법을 공부했다. 그 후 다양한 노동 현장을 체험하고 나서 2018년부터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사무국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