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블루스 The Thrill Is Gone
박여진 여행 작가, 백홍기 사진 작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존재감 무거운 배우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제주의 바다에, 길에, 시장에 흩어 놓았다. 배우들은 애초에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처럼 능청스레 사투리를 쓰며 순대 속을 채우고 얼음을 잘랐다. 시장에서 나물을 팔고 바다에서 물질을 했다. 생선 대가리도 야무지게 척척 잘랐다. 그들 사이로 끊임없이 들리지 않는 블루스가 흘렀다. 블루스는 음악이 아니라 사람이 연주하고 있었다.
몇 해 전, 백과 제주를 찾았다. 대체로 관광으로 소비하던 제주였지만 그해 우리는 책을 쓰기 위해 나름의 일거리를 잔뜩 안고 갔다. 에세이에 넣을 장소를 답사하고 촬영하고 글감을 모으고 걷고 또 걸었다. 숙소에 와서도 백은 사진을 정리하고 나는 글을 정리했다. 마감이 코앞이었다.
마감. 늘 우리를 빚쟁이처럼 몰아붙이는 부담스러운 단어. 사진과 글을 정리하기 무섭게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나 또다시 제주를 서성였다. 걷고 또 걷고, 찍고 또 찍고, 쓰고 또 썼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도, 백이 담고 싶은 풍경도 담기지 않았다. 일수 찍듯 또박또박 완수한 일정에서는 어떤 영감도 생기지 않았다. 복귀할 날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초조했고 불안했다.
“사진은 좀 찍었어?”
“그냥, 뭐. 별로. 너는 글은 좀 썼어?”
“나도 그냥 뭐. 별로.”
우린 제주에 글과 사진을 맡겨둔 사람처럼 아쉬워했다.
“이번 일정에서는 그냥 일 다 접고 쉴까?” 백이 제안했다.
“그건 안 되지. 지금 들어간 비용과 시간이 얼만데......”
“무턱대고 걷는다고 결과물이 나오는 게 아니잖아.”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
결국 우린 하루 쉬기로 타협하고 카메라와 노트북 전원을 껐다. 그리고 숲 한복판 그루터기에 앉았다. 편백 나무 사이로 가늘게 쪼개진 햇살이 그루터기 밑동에 동그랗게 내려앉았다. 어디선가 새가 울었고 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이 짙고 아름다운 숲 그늘에 앉아있어도 초조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불안이 채권자처럼 집요하게 나무 기둥마다 서성였다.
“아무도 없는데 음악이라도 들을까?”
계속 쉬기도, 일어나기도 어정쩡한 시간. 휴대폰에서 음악을 뒤적였다. B.B. King의 이 흘러나왔다. 어제 걸었던 밭담길 고랑이 떠올랐다. 그제 바닷가에서 마셨던 차가운 맥주도 떠올랐다. 음악이 밭과 맥주 사이를 어슬렁거리더니 이내 끈덕진 불안에도 스몄다. 마침내 B.B. King의 블루스가 단단하게 엉켰던 불안과 초조를 느슨하게 헤집었다.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온 마음을 뒤흔들었던 설렘은 사라지고 부담만 잔뜩 남은 자리에서 B.B.King이 한탄했다. 그 설렘은 어디로 갔냐고. B.B.King의 기타 연주가 절정에 치달았다. 그제야 나무들의 우듬지가 보였다.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는 새도 보였다. 낮곁에 조금씩 짙어지는 숲의 그림자도 보였다. 우리 대신 숲이 대답해주고 있었다. 괜찮다고. 조금 쉬어 가라고.
블루스는 12마디를 기본 음계로 하는 음악 장르다. 이 음악은 대체로 a, a, b 패턴으로 진행되는데 a에서는 부르기(call)로 b에서는 답하기(response)로 형식으로 구성된다. 부르기에서 신음하고 한탄하면 답하기에서 응답한다.
동석은 어머니를 원망하고 미워했고 훗날 그 어머니와 밥을 먹고 어머니를 등에 업고서야 이해라고 하는 응답을 들었다. 영옥은 품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다운증후군 언니의 존재를 버거워했고 그런 언니의 그림을 통해 후회와 사랑의 화답을 들었다. 한수는 바다에 둥둥 누워 은희에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돈 좀......’하고 외쳤다. 들리지 않는 외침은 은희의 우정으로 대답을 들었다. 가난 때문에 혹독한 삶을 살며 오해와 원망으로 멀어졌던 인권과 호식은 고등학생 자식인 정현과 현주가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멀어졌던 자리를 채웠다. 우울증으로 남편과 자식과 헤어진 선아는 끝도 없이 어둠 속에 침전하며 자신을 혐오했고 사랑과 시간이라고 하는 따뜻한 대답으로 조금씩 어둠과 혐오를 걷었다. 남편을 잃고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남편 친구와 결혼한 옥동은 그게 상처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상처라는 말조차 사치로 여기고 살았다. 하지만 동석은 상처받았고 어머니에게 등을 돌렸다. 훗날 동석의 그 등에 업히고서야 묻고 또 묻었던 감정과 말을 꺼냈다. 남편과 자식 셋을 잃은 춘희는 자신의 팔자를 한탄했고 하나 남은 자식마저 잃을 뻔하면서 지금의 팔자를 따뜻하게 포용했다.
드라마는 내내 결핍과 상처를 부르고 사람과 바다가 대답하며 흘러간다. 모든 삶의 시름이 드라마틱한 대답을 듣는 것은 아니다. 평생을 답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더러는 대답을 들어도 그것이 대답인지 알지 못하기도 한다. 드라마 구성을 위한 답이라 해도 <우리들의 블루스> 속 사람들이 듣는 대답들은 약간 위로가 되었다. 상처와 결핍으로 딱딱해진 마음이 영원히 굳지는 않으리라는 약간의 위안만으로도 드라마는 충분히 즐거웠다.
결국 그 일정에서 촬영하고 답사한 여행지는 한 곳도 책에 싣지 못했다. 다만, 덥고 피곤했던 한낮, 우리의 고단함과 불안에 대답했던 만 몇 년이 지나도록 남아 문득 불안이 기웃거릴 때 뜬금없이 재생되곤 한다.
진빌레밭담길은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에 위치한다. 바닷가 앞 제주도민들이 농사를 짓는 밭길이다. 머체왓숲길은 코스에 따라 2~6시간 정도 소요되는 아름다운 숲길이며 서귀포시 남원읍에 위치한다. 개방시간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이며 계절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촬영지였다.
에세이의 글과 사진은 PC해상도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글. 박여진
주중에는 주로 번역을 하고 주말과 휴일에는 산책 여행을 다닌다. 파주 ‘번역인’ 작업실에서 작업하면서 월간지에 여행 칼럼을 기고한다. 저서로 『토닥토닥, 숲길』, 『슬슬 거닐다』, 역서로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2』 외 수십 권이 있다.
사진. 백홍기
월간지 사진기자이자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회 ‘포토청’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사진디자인 석사 과정을 밟는 중이다. 저서로 『토닥토닥, 숲길』, 『슬슬 거닐다』가 있고 [아파트 연가]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 활동 및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