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의 서재는 탤런트, 성우, 코미디언 등 방송실연자의 다양한 감정과 영감, 창의력에 도움이 되는 양서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소설, 산문, 시, 인문학서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이 방송인 여러분에게 반짝이는 뮤즈가 되어 주길 기대합니다.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종종 무국적자 혹은 난민으로 명명되었으며, 신분증 하나 없는 미등록자나 합법적인 절차 없이 유입된 불법체류자로 표현될 때도 있었다. 그는 또한 누구와도 현실적인 교신을 할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이기도 했고, 인생과 세계 앞에서 무엇 하나 보장되는 것 없는 다른 땅에서 온 다른 부류의 사람, 곧 이방인이기도 했다.
소외와 배척의 테두리에서 공감하는 법을 찾는 이들에게
화자는 벨기에에서 탈북인 L의 흔적을 더듬어 간다. 그의 일기장, 그가 묵었던 숙소, 그가 주린 배를 쥐고 걸었던 거리 곳곳에서 자신의 삶을 그리고 뿌리 없이 떠도는 한 이방인의 삶을 바라본다. 불우한 이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작가인 화자와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윤주의 불행, 박윤철과 말기암으로 고통받다가 박윤철의 도움으로 안락사 한 사람, 로기완과 또 다른 이방인 라이카와의 관계는 죄책감으로, 연민으로, 공감으로 촘촘하게 변주된다. 로기완을 멸시했던 이들에게 화자는 “너희는 눈도 없고 귀도 없어? 누군가 아파서 빈방에 누워 앓고 있었어! 그런데 아무도 몰랐어. 아무도! 오히려 너희들은 그를 내쫓았지!” 하며 분노한다. 그 분노는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를 테두리 바깥으로 내몬 이들을 향한 분노이기도 하다.
L에서 시작해 로기완으로 불리게 된 한 탈북인의 일기장과 그 일기장에서 끊임없이 상처와 연민을 환기하는 화자의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로기완일 수도 있고 화자일 수도 있으며 이 책을 읽는 당신일 수도 있다.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1년
자, 들어보라. 나를 그대의 신으로 생각하라. 내가 그대를 상상치도 못했던 이야기 속으로 인도하리라. 옛날 옛적, 어느 먼 나라에 에미르(아랍국가의 군주나 족장)가 살았다. 그가 사는 도시는 아름다운 초록색 도시였다. 사방이 나무들로 우거져 있었고, 정교하게 꾸며진 분수가 콸콸거리는 소리는 밤마다 시민들에게 자장가가 되어주었다. 에미르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물려받은 재산도, 해마다 거둬들이는 수입도 엄청났다. 그는 건강했고 높은 지위와 멋진 외모에 만인의 존경까지, 그 모든 것을 누렸다. 거기에 남편밖에 모르는 아름다운 아내도 있었다. 다만 그의 마음에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공주는 열두 명이나 있지만 왕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에미르는 총리대신을 불렀다.
특별하고 매혹적인 이야기가 필요한 방송인을 위한 책
레바논 작가의 이야기다. 하카와티는 이야기꾼이라는 뜻으로 레바논어 ‘하키(haki)’가 어원이다. 코란과 성경, 신화, 전설,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이야기 등을 여러 나라의 상황과 잘 버무린 소설이다. 국내에서 레바논 소설은 흔하지 않기에 하카와티의 언어와 이야기들은 더욱 이국적이고 매혹적으로 와닿는다. 4가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유쾌하고 흥미진진하게 경험할 수 있지만 유쾌함이 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다. 전쟁, 내전 등으로 가혹한 시절을 보낸 레바논과 중동의 역사가 유쾌함의 이면에 자잘한 송곳처럼 나 있다. 더러는 뻔한 내용도 있고 예측 가능한 흐름도 있으며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도 있지만 쉴새 없이 재잘대며 흐르는 물처럼 이야기가 굽이굽이 흐른다.
흔하지 않은 소재, 흔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천일야화처럼 펼쳐지는 매혹적인 책이다.
아쉽게도 절판되어 중고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구해야 한다.
라비 알라메딘 지음 | 이재경 옮김 | 예담 | 2009년
이 네 가지 원칙을 마음에 새긴 우리는 우리 마을에 있는 돌과 손수 베어 낸 목재로 길고 야트막한 집을 지을 계획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평지를 놔 두고 바위가 울퉁불퉁하고 평평하지 않은 언덕배기에 집을 지을 생각이었다. 문을 세 군데에 두어, 문을 나서면 돌로 만든 뜰이 나타나리라. 그리고 집 앞으로는 짙은 갈색 빛깔의 발코니가 있어, 앞쪽의 스트래턴 산을 바라보고 있으리라. 낮게 내려앉은 지붕은 넓은 처마를 드리우고, 지붕 군데군데에 녹색 이끼가 끼어 있으리라. 이것이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는 우리 집의 모습이었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책
20년도 더 된 책이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치유의 언어를 들려주는 책이다. 숲, 메이플시럽, 바위, 이끼, 흙, 씨앗 같은 언어들이 이들의 삶에 깊숙이 베어 흐른다. 버몬트의 숲에 돌집을 지어 살며 자연에 해를 끼치지 않고 풍요롭게 살았던 부부의 삶은 읽는 것 만으로도 깊은 치유가 된다.
‘생산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익과 불로 소득을 축적하는데 반대’했던 이들 부부의 삶은 잉여와 착취가 없는 조용하고 평온한 날들이었다. 손수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집에서 사용하는 생활 필수품을 대부분 손수 만들어 살았던 이들 부부는 시간을 3등분해서 살았다. 8시간 수면, 8시간 노동, 8시간 여가. 이 단순하고도 고적한 삶은 분초를 다투며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니어링 부부는 “문명이란 사실 불필요한 생활필수품을 끝없이 늘려가는 것이다.”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인용하며 삶에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없애고 절제한다. 불필요함과 과잉, 잉여를 걷어낸 삶에는 오롯이 그들이 주인인 그들의 삶이 느리고도 바쁘게 흘러간다. 문득 너무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추천하는 책.
헬렌 니어링, 스코트 니어링 지음 | 류시화 옮김 | 보리 | 2000년
글. 박여진
insta @didibydidi email didibydidi@gmail.com ——— 읽고 또 읽고 걷고 또 걷는다. 번역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책을 읽고 무수한 길을 걷는다. 책에서 만난 새로운 길을 이야기하고, 길에서 만난 새로운 사색을 글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