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원컨대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장포수의 저 말이 드라마에 극적인 효과를 더해주는 약간의 과장이길 바랐다. 변변찮은 대접조차 해주지 않았던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으니 그들은 누군가에게 깊은 존경과 고마움을 받으며 빛나는 비석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가 모를 뿐.

의병들을 만나기 시작한 건 올봄부터였다. 어느 지역의 독립운동 흔적을 사진과 글로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맡아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을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그곳에 없었다. 빛나는 비석으로 남은 이들도 있으나 비석을 세워 기려줄 후손이나 가문이 없는 이들은 무너진 폐허에, 잊힌 비석에, 밭과 논이 되어버린 영토에서 쓸쓸히 지워지고 있었다. 그마저도 아니면 ‘무명의병용사충혼탑’ 하나에 수천 명의 이름으로 포개져 있었다.

<미스터 선샤인> 속 인물들의 이름에는 조국의 영역에 편입되지 못한 이방인의 이름이 겹쳐 있다. 최유진은 유진 초이로, 구동매는 이시다 쇼로, 이양화는 쿠도 히나로. 추방당하거나 배척당할 일 없는 고매한 기득권 집안의 자손인 고애신은 그 이름을 양복과 모자 속에 감추고 무명의 아무개가 된다.

자신들의 이름을 편안히 안착시켜주지 못한 조국은 애증의 대상으로, 증오의 땅으로, 무능한 국가로 서글프게 무너지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그들이 그토록 원망하던 조국의 땅에서 죽은 이유가 대체로 사랑이었으나 의병들에게는 모든 삶을 버리고라도 지켜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름조차 버리고 무명의 아무개가 되었다.

두려움이 매 순간 엄습했을 것이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웃을 때도 두려움은 이름만큼이나 당연하고 흔하게 달라붙었을 것이다. 모든 두려움 중에 자기 목숨이 소멸하는 두려움이 가장 크다. 하지만 의병들에게는 자기 목숨과 이름이 소멸하는 두려움보다 그 목숨과 이름을 포괄하는 조국이 소멸하는 두려움이 훨씬 컸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은 상실되지 않은 조국에서만 유효하다고 굳게 믿었을 것이다. 고애신이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애기씨와 의병 사이를 오갈 때, 두려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모든 순간에도 그 신념이 강을 건너게 했을 것이다.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거사에 나갈 때마다 생각하오. 죽음의 무게에 대해. 그래서 정확히 쏘고 빨리 튀지. 양복을 입고 얼굴을 가리면 우린 얼굴도 없이 오직 의병이오. 그래서 우린 서로가 꼭 필요하오. 할아버지께는 잔인하나 그렇게 환하게 뜨거웠다가 지려하오. 불꽃으로. 죽는 것은 두려우나 난 그리 선택했소.”

애기씨 고애신이 무명의 아무개가 되기 위해 건넜던 강은 안동 가송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이다. 고석정 앞을 흐르는 푸른 강. 드라마 속 의병이 아닌 일제강점기 시대 의병들도 그 강을 건넜을 것이다. 강을 건널 때마다 죽음의 무게를, 두려움을 삼켰을 것이다. 그 두려움이 나오지 못하도록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깨물었을 것이다. 옆에서 같은 두려움에 온몸을 떠는 아무개 동지들의 어깨를 토닥였을 것이다. 농민도 포수도, 도공, 노비, 상인, 기생, 주모도 자신들에게 인색하고 가혹했던 그 조국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무명의 아무개가 되었을 것이다.

우린 감나무가 붉게 익어가는 가송마을을 천천히 걸었다. 길은 퇴계 이황의 산책로였던 예던길까지 이어져 있었다. 우린 예던길로 들어가지 않고 고적한 가송길을 걷다가 다시 강으로 나왔고 강에서 다리를 건너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였던 고산정에 도착했다. 그리고 고산정에서 마을을 지나 벽련암 인근까지 갔다가 전망대에 오르지 않고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 어딘가에서 보았던 작은 절벽을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마을 건너편에는 여러 세월이 깎고 쌓은 절벽이 있었다. 고산정이나 벽련암같은 이름이 붙지 않은 무명의 절벽이었다. 절벽 위에는 작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우린 그곳에 앉았다.

아직 다 떠나지 못한 가을과 미처 완연히 들어오지 못한 겨울이 길과 강에 서로의 공기를 섞고 있었다. 계절이 머뭇거리는 동안에도 시간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고, 강은 단 한 순간도 머물지 않았다. 유구한 시간과 강의 순환 속에서, 원하건 원하지 않건 멈추는 건 인간이었다.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고 더는 흐르지 못하는 인간의 생. 인간이 필사적으로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도, 누군가의 이름을 간절히 기억하려 하는 것도 그 멈춘 지점에 남긴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우린 무명의 절벽에서 내내 강을 보았다.
강은 내내 그곳에 있었다.
그때도 흘렀고 지금도 흐르며 앞으로도 흐를 푸른 강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다.
무명에 포개진 수많은 의병의 이름.
잊혔고 잊히고 있으며 잊힐 이름.
아무 이름도 부르지 못하는 내 앞으로 강이 흘렀다.
부끄럽고 무안한 마음 한구석으로 드라마 속 기도문이 드문드문 지나갔다.

“고귀하고 위대한 자여, 나의 아들아. 네가 어디에 있든 널 위해 기도하마. 기도하지 않는 밤에도 늘 신이 너와 함께 하길 바라며…”

고산정은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서 고애신이 의병 훈련을 받기 위해 자주 건너던 강(낙동강)에 위치한 작은 정자다. 고산정 앞에서 낙동강을 따라 걸으면 벽련암에 도착한다. 고산정에서 벽련암 까지는 약 1시간가량 소요된다. 가송마을을 낙동강을 마주한 작은 마을이다. 인적이 드물고 풍광이 빼어난 마을이다. 마을에서 퇴계 이황의 산책로였던 예던길로 이어지는 길이 있으나 중간 중간 사유지가 있어서 드문드문 길이 끊기기도 한다. 푸른 강과 아름다운 주름을 지닌 바위 풍광이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곳이다.
가송마을:경북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3236-40, 고산정: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에세이의 글과 사진은 PC해상도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