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in KoBPRA

김준모
노조위원장


세련된 재킷에 단정하게 정돈한 머리, 누가 봐도 배우의 아우라가 풍기는 외모, 부드럽지만 또렷한 목소리. 배우 김준모가 아닌 노동자 김준모가 우리 앞에 앉았다. 인터뷰 내내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지만 ‘연기하는 노동자’를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힘을 내고 있었다.

 INTERVIEWER 오로라프로젝트   PHOTO 백홍기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이하 한연노)은 어떤 곳입니까?
대한민국에서 방송 연기자의 근로조건을 방송사업자와 교섭하는 유일한 단체입니다. 1988년에 탄생한 대중예술 분야의 노동조합으로 탤런트, 연극인, 무술인, 코미디언, 성우 이렇게 다섯 개의 지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최근 가입 대상이 ‘방송활동에 참여하는 모든 방송 연기자’에서 ‘영상물 제작에 참여하는 모든 배우’로 확대되었습니다. 방송환경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권리 사각지대에 있던 아동이나 청소년은 조합원 자격이 없었는데 제가 위원장을 하면서 아동 및 청소년도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게 대상 범위를 넓혔습니다. 최대한 많은 연기자가 조합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여러 문턱도 낮췄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회원 수가 6천 명이 넘었습니다.


2012년, ‘연기자는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판결이 7년 만인 2018년에 마침내 뒤집히면서 연기자도 노동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노동자의 권리인 교섭권도 생겼고요. 한연노의 주된 업무도 교섭 활동입니까?
우리 노동조합의 가장 큰 존재 이유죠. 단체 교섭과 단체 행동, 단체 의결이 조합에서 이루어지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교섭권이라고 봅니다. 조합원들의 처우나 근로조건 개선 등을 염두에 두고 교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방송 3사가 전부이던 과거와 비교했을 때 요즘은 방송환경이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채널의 증가는 물론이고 외주제작사의 증가, OTT 플랫폼에 이르기까지 교섭의 대상이 무척 다양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섭 활동은 조합의 가장 큰 존재 이유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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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준모가 어떻게 노동조합 위원장이 되셨습니까?
예전에는 대하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저도 대하드라마 배우였고요. 그런데 드라마 촬영을 하다 보니 배우들이 지나치게 열악한 환경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광경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그런 일을 많이 겪었고요. 촬영 현장에서 사극용 의상을 입으면 화장실 한 번 가기조차 힘든데 그런 열악한 환경이 마치 배우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팽배했어요.

A팀, B팀, C팀이 한꺼번에 촬영하는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연기자는 A팀 촬영 마치자마자 B팀, C팀 등으로 부랴부랴 가서 촬영 일정을 맞춰야 했지요. 연속 촬영이나 쪽대본도 활개를 쳤습니다. 배우들에게 최소한의 수면시간조차 보장되지 못했죠. 무리하고 고된 일정을 맞추느라 졸음운전 같은 사고도 많이 났어요. 당시에도 <겨울연가>나 <가을동화> 같은 한류 드라마가 큰 사랑을 받던 시기였는데 정작 배우들의 노동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죠. 그래서 문제 의식을 갖게 되었어요. 가장 기본적인 환경과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을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2011년도에 한연노의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조합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2012년, 방송사에서 우리는 연기자의 사용자가 아니고 방송사와 연기자는 종속관계나 상하관계가 아니므로 교섭을 할 수 없다고 했죠. 연기자가 필요할 때는 실컷 사용하다가 정작 책임져야 할 부분에서는 책임질 명분이 없다는 태도에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6~7년간 긴 싸움이 이어졌고 2018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연기자도 노동자라는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고요.
제가 조합에 몸담고 있는 동안 이런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저도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노동조합 위원장까지 맡게 되었고요. 다행히 임기 내에 그런 성과를 보게 되어 무척 보람을 느낍니다.

미국의 경우는 미국배우조합(SAG-AFTRA)이 막강한 힘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계약을 이 조합을 통해 맺다 보니 배우들이 조합에 갖는 신뢰도 꽤 크고요. 현재 한연노 같은 경우는 다섯 개의 지부 및 조합원들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며 어떻게 신뢰를 쌓고 있습니까?
홈페이지 및 SNS 등을 통해 소통 창구를 늘리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특히 일방적인 소통이 아닌 양방향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분들이 흩어져 계시니까 투표 한 번 하는 것도 큰일이더군요.
말씀하셨던 미국배우조합도 많이 참조하고 있습니다. 조합에서 계약조건을 포함한 배우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노력을 많이 기울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조합을 낯설어하던 배우들도 직접 억울한 상황을 겪게 되면 조합을 찾아와 도움을 구하곤 합니다. 조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면 조합의 존재 이유를 납득 하시더군요.
그러기 위해서는 조합이 좀 더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배우들처럼 한 사람당 컨테이너 하나씩 배정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배우가 의상을 갈아입고 대기 시간에 쉴 수 있는 공동 컨테이너라도 촬영장에 마련하려면 조합에서 계속 그런 권리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집단 이기심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조합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와 상식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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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연노 설립 34주년을 맞았습니다. 사람 나이로 보면 청년에서 중년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지금껏 조합이 해온 여러 일 중에 가장 큰 의미가 있었던 일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법원 판결을 통해 연기자도 노동자라는 지위를 인정받은 것이 아무래도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정식 노동조합임을 인정받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권리를 추구하게 된 것이 큰 성과죠.
변화의 물결 또한 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조합이 출범했던 80년대만 하더라도 연기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대우가 매우 낮은 편이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단계는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80년대 대한민국은 제조업에 강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누가 뭐래도 문화강국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잖습니까. 한국의 문화콘텐츠는 단순한 인기를 넘어 외교나 국격 상승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연기자의 권리와 근로조건 역시 많이 개선되어야 하고, 저희 조합이 그런 부분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도 설립 20년을 맞았습니다. 두 단체가 작년에 ‘지속적 상생 발전을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한 이유도 두 단체의 교집합에서 낼 수 있는 시너지 효과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맞습니다.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는 한연노에 뿌리를 두고 출발한 협회이지만 지금은 방송실연자들을 위한 중요한 단체가 되었습니다. 두 단체는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가장 실질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연기자가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고 출연료를 보장받으면 재방송료도 당연히 올라가니까요. 양 단체가 연대해서 함께 한다면 훨씬 더 좋은 결과들을 볼 수 있겠죠.

실제로 지난 10월 코로나 이후 3년 만에 협회와 노조가 공동으로 ‘2022 함께하는 한마당축제’를 개최했는데 참여했던 배우분들이 두 단체가 함께 하는 모습을 보니 무척 든든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말이 참 오래 마음에 남더라고요. 조용하지만 강력한 울림이었죠. 연기자를 위한 가장 큰 두 단체가 함께 한다면 조합원과 협회원들에게는 더욱 든든한 소통 창구가 생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고요. 그런 의미에서 두 단체의 상생과 연대는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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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예전에는 방송 채널이 3개였다가 지금은 셀 수 없이 많아졌습니다. OTT 플랫폼도 다양해지고 매체 자체도 다양해졌고요. 이 말은 한연노의 협상 테이블이 3개에서 수백 개로 늘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요. 이 시점에서 한연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무척 많습니다. 대하드라마의 부활이나 시각장애인을 위한 더빙 법제화, 코미디프로그램 부활 등 많은 것들이 있는데 지금은 외래 OTT 업체와의 교섭을 진행할 수 있는 단일 창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정부 차원에서 체계화 작업이 선행되었으면 합니다. 문화부, 환경노동위원회, 기재부 등 관련 부처마다 요구하는 바가 다르다면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없으니까요. 정부에서 그런 체계화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조합에서도 더욱 효율적인 교섭을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토종 OTT 업체들과는 교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30여 군데와 교섭을 진행했고 앞으로도 계속 범위를 확장할 생각입니다.

노조위원장 입장에서 보았을 때 방송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개선되어야 하는 점은 무엇입니까?
방송 현장에서 사망 사고를 비롯한 여러 사고가 많습니다. 말도 안 되게 혹독한 촬영 현장에서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고, 성공적으로 프로그램을 잘 마쳤지만 과로사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들이 지켜지지 않아서입니다. 배우가 인간답게 일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들이 충실히 지켜지는 것, 무척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안정적인 수입도 큰 문제입니다. 제작비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어가고 배우 출연료가 억 단위 작품이라고 해도 소수의 스타 배우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훨씬 적은 출연료를 받습니다. 실제로 조합원들의 구간 소득을 조사해본 적이 있는데 결과는 정말 처참했습니다. 연간 소득이 1천 만원 미만인 조합원이 69%였으니까요. 그마저도 소득이 없어서 아예 소득 신고를 못하는 사람도 20%대에 달했습니다. 억대의 출연료를 받는 배우는 1% 구간 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성희롱, 부적절한 스킨십, 출연을 미끼로 해서 배우를 이용하는 행태 등도 아주 큰 문제입니다. 실제 많은 배우들이 이런 문제로 조합을 찾아왔습니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죠. 저희도 가해자를 색출하고 배우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 문화콘텐츠의 파워는 날로 강해지는데 방송 현장에서는 아직도 개선되어야 할 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조합의 책임도 더욱 크게 느껴지고요.

한연노 위원장이자 방송실연자권리협회 협회원으로써,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우리 사회에 문화예술인이 미치는 영향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 영향력에 맞게 두 단체가 소통의 창구를 잘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체들이 연기자들을 위한 곳이라는 인식을 준다면 연기자도 훨씬 든든할 테니까요. 연기자도 여느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불안한 고용 상태, 불안한 임금, 각종 부당한 처우 등을 겪는 분이 많습니다. 연기자를 노동자로 보는 인식의 개선도 필요하고, 인간답게 일 할 수 있는 권리 보장도 중요합니다. 대접을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한 분야에서 일하는 노동자로서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는 보장받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래도 사회적 인식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 조합도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협회와 노조 모두 연기자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단체가 되길 바랍니다.


정말 마지막 질문입니다. 내년 3월에 위원장직을 마치시면 무슨 일을 하실 계획입니까?
놀아야죠. (웃음) 쉼 없이 달려왔으니 좀 쉬려고요. 사실 아내를 1년 동안 졸라 평소 가지고 싶었던 오토바이 한 대를 장만했어요. 그 오토바이로 조금은 편안한 곳을 기분 좋게 달려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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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내내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하지만 어느 한 마디도 흐릿하게 뭉개지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온화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내내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연기하는 노동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