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칼럼

실연자가 인공지능과
공존하려면

조병한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기획운영팀장

KoBPRA WEBZINE WRITE.S vol.85

저작물 이용의 정당성

<실연>이라는 연극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관객은 <실연>을 관람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고 티켓을 구입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국회에서 새로운 법이 만들어진다. 비평가에게는 <실연>의 티켓을 무료로 지급하라는 것이다. 비평가의 관람료를 무료로 하면 비평 활동이 왕성해져 공공복리가 증진되고 그 결과로 연극산업도 발전한다는 까닭이다. 곧 무료 티켓이 시장에 풀리자 <실연>의 예매율은 급감하게 된다. 극단은 어안이 벙벙한 채 환불창구를 닫아보지만 이미 좌석을 예매한 관객들은 왜 자신들만 돈을 주고 티켓을 산 것이냐며 아우성이다.

TDM 면책규정이 야기할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TDM 면책규정은 인공지능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저작물을 가져다 써도 저작권 침해 책임에서 면책하자는 취지의 규정이다. 이 규정이 입법된다면 일정한 요건을 갖춘 인공지능 기술 개발자가 우리 회원의 실연을 마음껏 복제해서 인공지능 실연자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이 규정은 실연자에게도 문제가 되지만 이미 실연자와 계약을 맺은 사업자(위 이야기의 관객)로서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시장에는 이미 실연자에게 적정한 보상을 약정하고 인공지능 기술 개발에 필요한 계약을 체결한 사업자들이 있다. 인공지능 성우 서비스를 제공하는 타입캐스트 김태수 대표의 인터뷰를 보면 자율적으로 공존을 도모하는 그들의 생각이 짐작된다.

Q. 인공지능이 학습을 위해 제공되는 성우의 목소리는 어떻게 보호되는지 궁금합니다.

A. 목소리에는 인격권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현재 저희는 성우분들이 목소리 모델링을 위해 목소리를 제공하면 그로 인한 수익금을 실연자로서 나눠드리는 계약을 체결하여 충분히 보상을 드리고, 무단으로 사용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 법적으로 미비한 부분도 있고 향후법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현재 보호받지 못한다고 해서 그분들의 노고를 무시하면 안 되니까요.(한국저작권보호원 © STORY 2021년 1월호)

이처럼 공정한 계약에 근거하여 인공지능 기술이 개발되는 실정이라면, TDM 면책규정의 도입 취지는 무색해진다. 게다가 TDM 면책규정을 근거로 기술을 개발할 경우에 그 기술을 기반으로 산업이 형성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산업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거래가 이루어져야 하고, 거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구성원이 정당하게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인공지능 산업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창작자로부터 정당하게 권리를 양수한 사업자가 인공지능 기술개발의 성과에 대한 독점권을 원활하게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면책을 받아 인공지능 실연자를 개발한다면, 사업자는 인공지능 실연자가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기 어렵게 된다. 공익을 향상한다는 기치 아래 면책을 받아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낸다면 그 성과 또한 공공재로써 누구나 이용할 수 있어야 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기술을 개발해야 할 유인이 모호해진다. 결국에는 면책규정을 통해 기술을 발달시킴으로써 산업을 활성화하겠다는 본래의 목적조차 달성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문화산업의 독점권과 창작자의 자연권

사업자가 행사하는 저작물에 대한 독점권의 정당성은 창작자의 자연권을 정당하게 양수하였다는 점에서 갖추어진다. 이러한 논리의 기원은 저작권법이 처음 태동할 당시로 거슬러간다.

18세기 영국의 사업자도 오늘날의 사업자와 마찬가지로 창작자의 권리를 양수하고자 하였다. 야마다 쇼지에 따르면, 당시 런던의 출판계를 회상하는 서점주의 발언이 아래와 같이 전해진다.(山田奬治, 송태욱 역,《해적판 스캔들-저작권과 해적판의 문화사》, 사계절, 2011, p.48.)

일반적으로 작가가 판권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 책의 판매는 썩 좋지 않은 법이다. 서점이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책이 내팽개쳐진 상태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서점이 대체로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작품이 성공하게 되면 질투심이 일기 때문이다. (작가는) 판권을 팔아버리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사전에 서점의 성격을 충분히 알아두어야 한다.

서점이 책을 관리하지 않으면 책이 잘 팔리지 않을 것이다. 저자가 그에 실망하면 서점은 그때 그 권리를 싸게 사들여 적극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저작권법이 태동할 당시에 행하여졌던 런던 서점주의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런던 서점주조합(Stationers’ Company)의 요구에 의해 최초의 저작권법이라 일컬어지는 ‘앤여왕법(Statute of Anne)’이 탄생하였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서점주조합은 창작자로부터 권리를 양수하지 않고 책을 찍어내는 이른바 ‘해적판’ 서점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이 지닌 독점적 출판권을 정당화할 논거가 필요했다. 그로 인해 서점주조합은 존 로크의 소유권 사상을 이론적 배경으로 삼아 저작자가 갖는 자연적 소유권으로서의 저작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저작자에게 자연적 소유권이 있으므로 그것을 양수한 자신들의 출판권 또한 유효하다는 것이다. 산업상의 독점권을 확보하려는 속셈으로 인하여 창작자의 자연권이 확립된 셈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저작권법이 확립되기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창작자의 권리를 정당하게 양수하였다는 점에 기초하여야 사업자의 독점권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점에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다. 오늘날의 상식으로 보아도 그 간명한 이치에 여타의 논리가 끼어들 자리는 그다지 없는 것 같다.


결론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문화산업의 독점권을 정당화해온 오래된 논리를 적용해보자면, 인공지능 생성물에 대한 사업자의 독점적 권리의 정당성은 인공지능 기술을 보유한 사업자가 공정한 계약을 통해 인공지능 학습용 데이터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창작자로부터 양수하였다는 점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창작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손쉽게 면책함으로써 인공지능 기술 발전을 도모한다면 산업의 기초적인 질서가 어지럽게 된다. 정책적 조치를 취한다면, 사업자로 하여금 인공지능이 학습하는 데이터 목록을 공개하도록 함으로써 창작자가 자신의 창작물이 이용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하고, 그 이용에 대하여 창작자와 사업자가 원활히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돕는 지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는 2024년 4월에 열릴 제45차 저작권상설위원회(SCCR)에서 설명회(information session)를 개최하여 인공지능에 의한 저작권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하였다. 국제적 수준의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이제는 인공지능 실연자와 공존하기 위해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할 시점일 것이다. 창작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고 그것을 기초로 공정한 계약을 체결하는 관행이 정착된다면, 산업과 기술, 인간 창작자가 모두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