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은 한겨레 문화부 기자
KoBPRA WEBZINE WRITE.S vol.85
지난 2일 시작한 JTBC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 첫 회에 아주 특별한 인물이 카메오로 출연했다. 주인공 조용필(지창욱)과 조삼달(신혜선)이 어린 시절인 1994년 ‘전국노래자랑’에 참가한 장면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송해가 진행자로 등장한 것이다. 자료 화면을 사용한 것도, 다른 배우가 분장으로 흉내 낸 것도 아니다. 분명 그때 그 시절의 송해다. 송해는 “일요일의 남자 송해”라며 관객들한테 인사도 하고 참가자들한테 말을 걸며 “껄껄” 웃기도 한다.
© JTBC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
이 장면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바로 요즘 화두인 생성형 인공지능(AI) 기술 중 딥페이크를 활용한 것이다. 딥페이크는 딥러닝(deep learning)과 페이크(fake)의 합성어로, 컴퓨터가 스스로 외부 데이터를 조합·분석하는 딥러닝을 활용해 기존 인물의 얼굴이나 특정 부위를 합성한 기술을 말한다. <웰컴투 삼달리>에서도 1994년 ‘전국노래자랑’ 속 송해 영상을 모아 생성형 인공지능을 학습시킨 뒤 나온 결과물을 대역의 얼굴에 합성했다. 입 모양과 표정이 다소 어색하지만, 장면의 현장감은 제대로 살렸다. 한국 드라마에서 딥페이크를 활용해 인물을 되살린 대표적인 사례다.
딥페이크로 되살린 송해...드라마 제작 현장에 녹아든 AI
한국 콘텐츠 제작에서 이제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의 도입은 거스를 수 없는 추세다. <웰컴투 삼달리> 사례처럼 이미 딥페이크는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지난달 17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독전2>를 만들면서 제작진이 <독전1>에 나온 고 김주혁을 딥페이크로 재현하는 방안을 고민하기도 했다. <독전2>를 연출한 백종열 감독은 “시즌2에서는 고 김주혁 씨를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비슷한 몸을 가진 분을 섭외해 딥페이크 기술을 사용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여러 이유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 중 페이스 디에이징으로 동일인이 과거 모습을 연기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지난 3월 종영한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카지노>에서는 제작진이 60대 배우인 최민식의 얼굴을 페이스 디에이징을 사용해 30대로 만들었다. 최민식이 30대에 연기한 작품들을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인지한 뒤 나온 결과물을 최민식의 얼굴에 합성한 것이다. 올해 초 한 티브이 광고에서는 20대 윤여정이 등장하기도 했다. 1971년 영화 <화녀> 속 윤여정 얼굴과 70대인 현재 얼굴을 섞어서 구현했다.
© 넷플릭스 드라마 <카지노>
넷플릭스 영화 <아이리시맨>에서 70대 배우 얼굴을 20대로 바꾸는 등 외국에서는 보다 활발하다. 목소리를 구현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이창>, <현기증> 등으로 유명한 지미 스튜어트는 1997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목소리는 최근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되살아나 한 수면·명상 애플리케이션에 사용됐다.
배우들이 생성형 인공지능이 집필한 드라마로 연기할 날도 머잖았다.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해 대본을 쓰는 실험이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실제로 국내 한 대학에서 인공지능이 생성한 대본으로 인공지능 배우가 연기한 드라마를 제작해 공개한 사례가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도 신기술 기반 랩 스토리피아에서 탄생한 16편의 드라마 기획안과 국내 제작사들이 1:1로 만남의 자리를 가진 바 있다.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가 챗지피티에 출생의 비밀, 죽을병, 삼각관계 등 막장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조건을 입력했더니 여러 버전의 대본이 등장했다고 한다.
A.I 배우, 기대감 속 기회 앗아갈 우려는
그러나 생성형 인공지능이 무분별하게 사용될 경우 콘텐츠 종사자들의 기회를 앗아갈 우려는 꾸준히 제기된다. 주인공의 30대 역할을 해당 나이의 다른 배우한테 맡길 필요 없이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구현할 수 있어서다. 잠깐 등장하는 역할도 생성형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으면 아주 유명한 배우를 기용할 수도 있다. 실제로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로 만든 가상의 인물이 배역을 맡아 대신 연기하는 사례는 있다.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선보인 공상과학영화 <마인드 유니버스>는 작곡가 김형석을 딥페이크로 구현해 연기를 시켰다. 30년 뒤 미래 우주탐사대원 김소리(김예랑)가 아버지 김형석(김형석) 작곡가의 부고를 접한 뒤 비대면 상조 서비스에 접속하는 이야기다. 김형석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포함한 일부 장면 외에는 모두 딥페이크로 제작했다. 아예 가상의 인물이 배우로 데뷔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웹드라마 <안녕하쉐어>에서는 가상 인물 제인이 출연했다.
기술만 사용할 수 있으면 유명인의 이미지와 목소리 복제가 가능해서 지식재산권과 인권 침해 논란도 야기된다. <웰컴투 삼달리>는 5분 남짓 장면을 구현하려고 故 송해의 유족과 1년 가까이 소통하며 조심스럽게 작업했지만, 이미 떠난 사람을 기술의 힘으로 되살려야 하느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 9월 드라마 <왕좌의 게임> 원작자인 조지 R.R. 마틴과 존 그리샴 등 유명 작가들이 생성형 인공지능을 상대로 저작권 침해를 주장하는 집단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배우들의 사건·사고로 사장 위기에 처한 작품을 되살리는 등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작 현장에서는 긍정적인 분위기다. 최근까지도 사건,사고에 휘말린 배우들이 활동을 중단하면서 출연작이 보류되거나 미뤄지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무리해서 공개하더라도 해당 배우 분량을 최대한 편집해야 해서 내용 전개가 어색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다른 배우의 얼굴을 합성한다면 노력이 물거품 되는 걸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노창희 디지털 산업정책연구소 소장은 “2022년 이후 인공지능 관련 기술 투자가 급증하는 등 콘텐츠와 기술의 결합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시너지를 내어 긍정적인 효과를 창출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생성형 인공지능을 대중매체에서 열심히 활용하는 한편으로 이를 경고하는 콘텐츠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지난 6월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6 첫 번째 에피소드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지배한 현실의 대단함과 위험성을 경고하는 내용으로 화제를 모았다. 비연예인의 일상이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드라마로 방영되고, 유명인의 가상 버전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유명인은 사인 한 장으로 직접 연기하지 않아도 드라마 속 주연을 맡을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권 침해 등에 대응할 방안은 없다. 드라마 속 얘기만은 아니다. 현실이 될 날은 머잖았다. 드라마에서는 과한 사용으로 결국 어떤 문제가 야기된다. 현실에서는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