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는 호흡에서 시작된다.
들어온 숨이 나가는 숨으로 바뀔 때 성대 근육이 떨리고 이 떨림이 소리가 된다.
그렇게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공기라고 하는 매질을 통해 파동 형태로 퍼져 나간다.
호흡에서 시작된 소리는 누군가의 귀로 들어가 잠시 머물다 흘러가기도 하고
귀에서 마음으로 들어가 평생 잊히지 않는 울림이 되기도 한다.
한강이 내다보이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성우 이연희를 만났다.
따뜻하지만 힘 있는 눈빛, 정중하고 기분 좋은 몸짓, 봄처럼 화사한 노란색 셔츠를 입은
그의 입에서 ‘안녕하세요. 이연희입니다.’ 하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
단순한 인사였지만 그 인사 소리가 내 귓가를 편안하게 지나 스튜디오 구석구석 스몄다.
인터뷰 내내 그가 전달하는 언어에는 특유의 힘이 있었다.
귀를 기울이게 하고, 마음을 열게 하는 힘이
세련되고 정제된 톤과 억양과 리듬을 타고 기분 좋게 전달되었다.
사단법인 한국성우협회 27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성우 이연희입니다. 세 번째 연임으로 8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KBS 공채 16기 성우이고 현재 45년째 성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성우협회는 일제 강점기부터 라디오 방송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47년부터 KBS 극회라는 이름으로 공식 출범했고요, 1954년에 KBS에서 1기 공채 성우를 뽑아서 본격적인 조직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올해로 70년 차에 접어드는 유서 깊은 단체입니다. 이후 라디오 드라마가 인기를 누리고 외화 더빙 및 애니메이션, 게임 등 성우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더욱 활성화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오늘 제 모습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지요. 원래 꿈은 작가였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성우로 활동하시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성우라는 직업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고, 당신께서도 제가 성우가 되길 바라셨어요. 어머니 바람도 있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을 봤는데 덜컥 합격해서 그 길로 성우가 되었지요. 처음엔 몰랐는데 할수록 점점 매력 있는 직업이더군요.
흔히들 목소리로만 일하는 직업이라 쉬운 직업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오직 소리로 전달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고도의 집중력과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입니다. 공감 능력이나 소통 능력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 직업이기도 하고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공감이 없으면 제대로 된 소리로 언어를 전달할 수 없습니다. 표현은 소리 하나이지만, 그 하나에 보이지 않는 모든 감정과 상황을 담아야 하는 어려운 직업입니다.
“목소리는 내 입에서 나오지만, 상대의 귀로 들어가는, 이타적인 성질이 있어요. 타인에게 가장 적합한 말을 가장 울림 있고 가장 편한 소리로 전달하는 일이 성우의 일이고요.”
맞습니다. 목소리에 담긴 힘이 정말 중요해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사람의 신체 요소는 아무 표현 없이 있으면 그냥 외형 내지는 인상에 지나지 않지요. 하지만 그 사람이 입을 열어 어떤 말과 감정을 전달하는 순간 그 사람을 고유의 ‘존재’로 인식하게 됩니다.
목소리는 내 입에서 나오지만, 상대의 귀로 들어가는, 이타적인 성질이 있어요. 타인에게 가장 적합한 말을 가장 울림 있고 가장 편한 소리로 전달하는 일이 성우의 일이고요. 아까 말씀드린 공감 능력과 소통 능력도 이런 맥락입니다. 관계를 설정하고, 그 관계의 깊이와 폭을 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목소리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영역에 ‘타인’이 들어왔다는 인식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분들 내레이션을 듣다 보면 솔직히, 참 좋더군요. (웃음)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콘텐츠에 맞게 자연스러운 내레이션을 하시는 분이 많더라고요. 양희은 선배님이나 강부자 선생님 같은 분들이 그 역할을 하시는데 참 듣기 좋았습니다. 좀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성우들은 전문가 티를 벗기가 참 어려워요. 그래서 광고 녹음실에서 자주 듣는 말이 ‘성우답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말이지요. 연기자들은 그 자연스러움을 잘 표현하시는 것 같아요. 좋은 점은 좋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다른 분야의 분들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우도 달라진 문화, 달라진 흐름에 맞게 연구하고 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우에게는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표현력과 전달력이 있어요. 목소리의 힘이 있지요. 실제로, 성우의 지나치게 매끄럽고 정돈된 톤이 부담스러워서 일반인에게 광고나 연기를 의뢰했다가 결국 성우에게 재의뢰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아요. 우리 성우들도 기본기를 탄탄히 갖추고 그 위에 부단한 연구와 노력을 얹어 현재의 흐름에 맞는 소리를 더욱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현재 국내에 약 800명의 성우가 활동 중입니다. 무엇보다도 성우의 권익에서 중요한 부분은 저작인접권인데요,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를 통해 저작인접권을 보장받고 있습니다만 마음대로 우리 목소리를 사용하는 곳을 일일이 찾아내기가 어렵습니다. 기관이나 기업, 기타 여러 분야에서 성우들의 목소리를 마음대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기관에서 후배 성우의 목소리가 허락이나 계약 없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 모든 경우를 하나하나 찾아서 저작인접권을 보호받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쉽지는 않지만 우리 성우들의 권리를 위해 무단 사용되는 사례가 접수되면 무조건 찾아가서 해결 방법을 찾을 겁니다. 거기가 지구 끝이라 해도. 그게 협회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고요.
지금 우리가 당면한 가장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실제로 한 후배가 그 문제로 제게 고민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모 업체에서 일정 돈을 줄 테니,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연령대의 목소리와 분노, 기쁨, 슬픔 등 모든 감정을 녹음해달라고 제안했다고 하더군요. 언뜻 들으면 그게 대수인가 싶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어느 범위까지, 어느 기한까지 확대 사용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런 경우는 단발성 계약이 아니라 사용되는 범위와 기간에 따른 수익률을 고려해 체계적인 계약이 맺어져야 합니다. 한 사람의 목소리를 그렇게 물건처럼 한꺼번에, 저렴하게 팔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AI는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성우와 AI가 더불어 성장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정부에서 AI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우협회도 7~8년 전부터 정부와 다양한 연계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교육부와는 청소년 교육 분야를, 문체부와는 공연 기획 및 바른 우리말 정체성 확립을 위한 프로그램을, 과기부와는 역량교육 분야를 연계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AI 산업을 육성하면 우리 성우도 그에 맞는 연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고 앞으로도 다양한 협업 활동을 할 계획입니다. AI가 성우의 영역을 대신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지만, 그런 때일수록 오히려 전문 성우의 중요성을 인식시킬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동반 성장과 역량 재창조가 우리의 역할이지요.
“우리말 더빙 법제화는 결과가 아니라 시작입니다. 우리 성우들은 이번 법제화를 출발선으로 삼아 더욱 큰 노력을 기울일 겁니다.”
무엇보다도 시각장애인이나 노인, 시각 약자 등을 위한 일입니다. 사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방송과 폐쇄 자막은 많이 보편화되었는데 50만에 달하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방송 배려가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65세 이상 노령층에도 자막 방송보다는 우리말 더빙 방송이 훨씬 편하고요. 다문화 가정에서도 자녀에게 올바른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더빙 방송이 필수지요. 자막 시청 소외계층은 900만이 넘습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 꼭 필요한 법이었는데,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통과되어서 무척 기쁩니다.
특히 요즘 청소년들 언어 사용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넷 용어나 축약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곤 하지요. 영화 한 편이라도 정확한 우리말로 보게 해준다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유럽 선진국에서는 더빙 법제화가 이미 실시되어서 더빙되지 않는 영화를 보기가 힘들 정도예요.
한 예로, 모 기관 기관장님이 이탈리아로 출장을 갔는데, 그곳에서 <기생충> 영화를 보려고 자막 영화를 찾으셨대요. 그런데 정말 단 한 곳에서도 자막 영화를 상영하지 않아서 결국 못 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만큼 더빙 문화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거죠. K 콘텐츠 수출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정작 우리말의 현주소는 처참할 정도로 찾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말 더빙 법제화는 우리말의 주소를 다시 확립하고, 더 깊이 뿌리내리게 하는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2022년 8월 17일에 열린 우리말 더빙 법제화를 위한 토론호에 참석한 한국성우협회원 및 관계자들
흔히 ‘외화톤’이라고들 하죠. (웃음) 그 부분 관련한 교육도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더 깊이, 더 다각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게 언어를 전달하되 너무 전문가 티가 나지 않는, 배우의 개성과 연령대에 맞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많이 연구하고 노력해야 하겠지요. 그런 훈련이 잘되어야 친근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더빙 문화가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제화는 결과가 아니라 시작입니다. 우리 성우들은 이번 법제화를 출발선으로 삼아 더 큰 노력을 기울일 겁니다. 많은 분이 성우협회의 노력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에서도 성우 역량 강화를 위한 지원을 해주셨고요.
또한, 정확하고 바른 우리말 사용을 위해 우리 성우들이 앞장설 계획입니다.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송영웅 이사장,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김영진 위원장, 코미디언 협회 김학래 이사장, 한국방송연기자협회 최수종 이사장 등 많은 분들과 협업을 통한 시너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 연기자들의 정확한 발성 및 발음을 위한 강의도 성우들이 주축이 되고 있습니다. 간혹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한국어의 장음과 단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 분들을 위한 정확한 발음, 체계적인 발성 등을 교육하는 것도 성우들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목소리가 번지는 그 끝에서 벚꽃이 정말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하게 흩날리고 있었어요.
무척 아름다운 순간이었고, 무척 아름다운 소리였어요.”
얼마 전 성우 동료들과 속초 쪽으로 연수를 간 적이 있어요. 벚꽃이 한창 흐드러진 아름다운 봄날이었지요.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벚꽃이 하도 아름다워서 창문을 열고 흩날리는 꽃잎을 영상으로 촬영했어요. 연수를 마치고 서울에 와서 그때 찍은 영상을 보는데, “와~예쁘다!”, “아름답다”, “저 꽃 좀 봐.” 하는 우리 목소리가 아름답게 울리고 있더군요. 목소리가 번지는 그 끝에서 벚꽃이 정말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하게 흩날리고 있었어요. 무척 아름다운 순간이었고, 무척 아름다운 소리였어요.
좋은 목소리는 세상 모든 존재의 속성을 더욱 그 본질에 가깝게 표현하는 힘이 있어요. 아름다운 것이든 슬픈 것이든. 그런 목소리를 누군가의 귀에 편안하게 전달한다는 건 무척 멋진 일 같아요.
좋은 목소리는 없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는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단순히 매끄럽고 좋은 목소리는 오히려 맹점이 되기 쉽죠. 그런데 듣기 좋은 목소리는 사람의 귀로 들어가 마음에 안착해요. 어떤 목소리는 평생 잊히지 않는 울림이 되기도 하고요. 내 입에서 출발해 누군가의 귀를 만나 그 사람의 마음까지 파고드는 것이 듣기 좋은 목소리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보이스 메이킹에 관한 강의를 해요. 사람마다 음색은 다르지만, 자신의 음색에 최적화된 표현을 통해 듣기 좋은 목소리로 바꾸는 방법을 제시하죠. 저도 여자 성우치고는 톤이 살짝 낮은 편인데요, 이런 제 톤에 맞게 소리를 내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듣는 사람에게 정확하고 편안한 소리를 전달하려고 하지요. 이렇게 전달된 소리는 그냥 흘러가지 않아요. 머리와 가슴에 잘 저장되지요. 제 동료 성우 한 명도 옛날 기준으로 보면 성우 톤에 맞지 않는 음색을 지녔는데, 자신만의 음색으로 보이스 메이킹을 해서 정말 스미듯이 멋진 소리를 만들었어요. 지금 광고도 가장 많이 할 정도로 성공했죠.
말씀하셨듯, 목소리는 그 사람의 소리 지문과도 같아요. 이런 음색으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밖에 없지요. 정말 대단한 정체성이지요. 이 정체성을 개발하고 단련하는 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제겐 아직 실현하지 않은 꿈이 남아 있어요. 작가가 되는 꿈이요. 제가 오랜 세월 강의를 하다 보니 강의 자료가 꽤 많아 쌓였더라고요. 얼마 전 변호사협회에서 강의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제 강의 주제가 ‘말 잘하기보다 잘 말하기’였어요. 변호사는 당연히 저보다 언변이 좋겠지만 재판에서 이기려면 ‘잘 말하는 요령’이 정말 중요하지요. 어느 지점에서 잠시 쉬고, 어느 지점에서 힘을 주고, 어느 지점에서 힘을 빼고 이런 요령들이 말 잘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자료들을 모아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 남편 소원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예요. 언젠가 시간이 되면 제주도든 어디든 가서 조용히 생각을 정리해 책을 쓰고 싶어요.
한국성우협회는 70년 역사를 걸어오고 있습니다. 아흔을 넘긴 연세에도 멋진 목소리를 내시는 선배님부터, 지금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함께 기록하는 동료 성우들, 열심히 꿈을 준비해 이제 막 성우가 된, 꽃봉오리 같은 어린 후배들까지 세대를 초월해 한 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지키고 다져야 할 전통과 역사가 있습니다. 또 새롭게 적응하고 앞서 나가야 할 새로운 미디어 생태계도 있습니다. 지나온 시간과 지금 이 시간, 앞으로 다가올 시간, 이 모든 시간에 우리 협회가 존재했고, 존재하고, 존재할 겁니다.
우리 성우협회는 그 어떤 시기에도 무력하게 시들지 않는 단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의미 있는 파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니까요. 이제 숙원이었던 우리말 더빙 법제화가 이루어졌으니 2024년 협회의 방향 목표인 ‘성우, 그 무한 역량과 가치 실현’이라는 표어에 맞게 멋지게 행군해야죠.
인터뷰 자리엔 그가 들고 온 종이가 몇 장 있었다.
인터뷰 며칠 전 보낸 질문지였다. 질문마다 손으로 정성껏 쓴 답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인터뷰 내내 그 질문지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아마 그 답을 쓰고, 소리 내서 읽고 준비하며 이미 다 머릿속에 저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답은 막힘이 없었고, 잘 정돈된 언어와 가장 정확하고 듣기 좋은 소리로 내 귀에 안착했다. 그리고 그가 그의 언어에 실은 힘이 마음 한 구석에 묵직하게 자리했다.
인터뷰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도 ‘우리말’, ‘듣기 좋은 소리’, ‘더빙법제화의 필요성’ 등 그저 문자에 불과했던 언어들이 귀를 통과해 머리와 가슴 어딘가에 안착했을 것이다.
앞으로 이연희 성우가 걸을 모든 길에 흔들리지 않는
그의 목소리가 좋은 이정표가 되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