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할리우드 배우의 권리와 자부심

미국배우조합(SAG-AFTRA)의 회원이 되기까지

이종원 미국 변호사 겸 언론인

KoBPRA WEBZINE WRITE.S vol.83 

나는 몇 년 전부터 가끔 할리우드 영화와 드라마에 단역이나 엑스트라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촬영 현장에서 미국배우조합(SAG-AFTRA, 이하 ‘조합’) 소속 배우들을 자주 만나는데, 그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과 프로페셔널리즘에 놀라곤 한다. 촬영 중 만난 흑인 여성 한 명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조합원이며, 언젠가 비중 있는 배역을 맡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70대 백인 할머니는 30년 간 몸담은 중학교 교사직을 은퇴한 후 지금은 단역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며, 자신은 조합에 속해있으며 인터넷영화데이터베이스(IMDB, In-memory database)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미국배우조합은 영화배우조합(SAG, Screen Actors Guild)과 미국TV라디오아티스트연합(AFTRA, American Federation of Television and Radio Artists)이 2012년 합병해 출범했다. 1930년대 미국 영화계의 가혹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출범한 이 단체는 미국 최대 노조연합인 미국 노동 총연맹 산업별 조합회의(AFL-CIO, 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nd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의 산하 조직이다. 현재 미국 영화와 방송 산업의 90%를 차지하는 영화TV제작자연맹(AMPTP, Alliance of Motion Picture TV Producers)과 3년마다 미국 노동법에 따라 노사협상을 시행하면서 조합원의 근로조건 개선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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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에 위치한 미국배우조합(SAG-AFTRA)의 본사 건물



미국배우조합원이 되려면

2023년 현재 조합에 소속된 배우는 약 16만 명이다. 미국은 한국처럼 방송사 연기자 공채와 같은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조합에 가입하기 위해 다음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해야 한다.

첫째,
조합과 영화TV제작자연맹 사이의 노동 규약이 적용된 작품에 캐스팅되어야 한다.

영화TV제작자연맹은 워너브라더스, 디즈니, 넷플릭스 등 미국 영화와 드라마 업계의 90%를 차지하는 거대한 사용자 집단이다. 따라서 이들이 제작하지 않는, 즉 비노조 작품(non-union)이라 불리는 영화(독립영화나 학생 작품)에는 여러번 출연해도 조합의 가입 자격을 얻을 수 없다. 뒤집어 보면 조합원이 되면 미국 내 주요 영화사에서 제작하는 작품에 캐스팅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셈이다. 이는 조합원을 지켜주는 보호막이자 비노조합원에게는 일종의 장벽의 역할을 한다.

둘째,
작품 속에서 아주 짧은 대사나 연기를 해야 한다.

첫 번째 조건과 함께 필수적인 조건이다. 간혹 말없이 지나가던 배우가 갑자기 감독의 요구로 간단한 연기를 하거나 대사를 하는 경우가 있다. 내 주변에도 감독이 가만히 서 있던 한국인 엑스트라에게 갑자기 “한국말로 뭐라고 한마디 해보라.”라고 주문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경우 해당 배우는 한순간에 엑스트라에서 곧바로 조합의 가입자격을 얻은 셈이다.

셋째,
두 단체가 주최한 영화 오디션에 합격하거나, 스턴트맨 등 특수 기술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공채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영화배우를 캐스팅하려면 에이전시 소속 배우나 스턴트맨 데이터베이스에 의존하거나, 신인 공개 오디션을 열어야 한다. 오디션에 합격하는 순간 아마추어 배우는 자동적으로 조합의 가입자격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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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각자의 미국배우조합 회원증으로 사진을 찍어 조합한 사진. 자긍심과 연대의 힘을 느낄 수 있다. __ 사진출처 SAG-AFTRA



미국배우조합의 구체적인 역할은?

물론 조합원이 된다고 바로 메이저 작품에 캐스팅 된다는 보장은 없다. 조합 가입은 시작에 불과하다. 하지만 배우에게 있어 조합 가입의 유무가 중요한 이유는 배우로서의 자부심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이득을 제공받고 있기 때문이다. 조합이 배우들에게 제공하는 분야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최저임금과 재방송료 협상 및 분배이다.

조합은 아마존, 애플TV, 넷플릭스 등 각 업계에 판매되는 영화, 드라마에 출연하는 조합원의 최저임금(minimum wage)과 재방송료(residual)를 아주 세세하게 차등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조합 소속 스턴트맨은 주급을 최소 3840달러(한화 496만원, 환율 2023.6 기준)가 보장되어야 한다. 재방송료 역시 마찬가지다. 아마존의 1시간짜리 스트리밍 전용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에게는 방송 후 3년까지 최저 1273달러(한화 164만원)의 재방송료가 지급되어야 한다.

물론 그 이상의 금액은 얼마든지 줄 수 있지만, 반대로 그 이하는 노사협약 위반이 된다. 또한 재방송료 대신 일시불로 얼마의 돈을 주고 끝내는 이른바 ‘퉁치는’ 행위도 금지하고 있다. 조합은 이렇게 조합원들의 재방송료를 매년 지급받고 조합원들에게 수표로 분배하는데, 그 액수는 2019년 기준 6억4200만 달러(한화 8,300억)이다. 일거리나 수입이 일정치 않는 배우들은 이렇게 제공되는 재방송료로 최소한의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는
업계의 최소 근로조건의 수립이다.

노조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근로조건의 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조합은 3년마다 영화TV제작자연맹과 노사협상을 벌여 주당 근무시간부터 식사시간까지 최소의 근로조건을 수립한다. 근로조건 준수 작업장은 아무리 작은 배역의 배우에게도 빛을 가릴 수 있는 텐트 또는 냉난방이 갖춰진 실내 대기실을 제공되어야 한다. 식사시간은 ‘촬영을 가장 늦게 마친 배우가 식사를 배급받은 후 최소 40분’으로 규정되어 있다. 유명 배우는 여유있게 밥을 먹고, 무명 배우는 허겁지겁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상황을 방지하자는 취지다.

세 번째는
촬영 중 안전조치와 의료보험의 제공이다.

조합 근로규약을 준수하는 촬영장에는 응급요원이 대기하고 있으며, 스턴트 또는 총기 사용 시에는 특수 훈련 및 안전규약 준수회의를 갖도록 규정하여 안전사고를 방지한다. 또한 조합원을 위한 의료보험도 제공한다. 배우는 월급생활자와 달리 몇 개월 마다 일자리가 바뀌기 때문에 직장의료보험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조합은 재방송료 및 회비의 일부를 적립해 조합원들이 일거리가 없을 때에도 최소한의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네 번째는
현재 트렌드의 적극적인 반영이다.

최근 몇 년간 할리우드를 휩쓸었던 화두는 ‘여성 연기자에 대한 부적절한 대우’를 폭로하는 ‘미투’(me too) 운동이었다. 이에 따라 조합은 2020년부터 노출신 촬영 및 오디션에 대해 아주 세세한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출 장면이 있는 작품에 연기자를 캐스팅하면 오디션 전에 반드시 연기 내용을 상세하게 공고해야 하며, 호텔 등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공개된 장소에서 최소 인원만 참석해야 한다. 노출신 촬영 48시간 전에는 다시 연기자에게 동의서를 받은 후 최소인원이 참석해 촬영해야 하며, 홍보에도 배우의 동의를 받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단체 협상과 파업에 관한 역할이다.

앞서 언급된 역할이 실현 가능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단체협약 및 파업권’에서 나온다. 파업은 작게는 특정 영화 현장이 될 수도 있고, 미국 영화업계 전체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미국배우조합 지역 분회장은 촬영조건이 열악하다고 판단할 경우 조합원들에게 일종의 조업거부인 촬영장 철수(work off)를 주문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상황이 한번이라도 발생하면 해당 영화 프로듀서는 현장관리능력을 의심받게 되고, 노조원들은 그날 일당을 날리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배우들이 합법적으로 촬영을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압박의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제작사는 배우들의 촬영 여건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배우에게 있어 파업은 언제나 선택 가능한 옵션이 되는 셈이다. 조합은 오는 2023년 6월 30일, 영화TV제작자연맹과의 노사협약 만료를 앞두고 지난 6월 5일 파업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97.9%의 조합원이 파업에 찬성했다. 물론 파업투표 찬성이 반드시 실제 파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배우조합 회장 프랜드레셔(Fran Drescher)는 파업 찬성률이 높을수록 영화TV제작자연맹과의 노사협상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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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배우조합 회장 프랜 드레셔(오른쪽) __ 사진출처 washingtonpost



이상으로 미국배우조합의 가입조건과 역할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물론 미국 영화계의 상황을 한국에 동일한 조건으로 대입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국가이든 배우들의 노동권 보장을 위해서는 연기자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노동권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리고 지지가 있어야 하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런 점은 비단 제작사 뿐만 아니라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연기자도 가까이 다가가서 늘 관심있게 지켜보고 참여해야하는 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연기자가 배역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배우로서의 자긍심을 가지며 활동하는 그 순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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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

미국 변호사 겸 아마추어 단역배우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조지아 주립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애틀랜타 로펌에서 근무하며 가끔 미국 영화, 드라마에 작은 배역으로 출연한다. 출연작으로 HBO '러브크래프트 컨트리(Lovecraft Country)', 디즈니플러스 '발렛(The Valet)'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