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는 책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의 촬영지,
파주 출판문화단지
박여진 여행 작가, 백홍기 사진 작가
우리는 모두 서가에 꽂힌 책과 같은 존재다.
누군가 발견해주기를 기다리고
누군가 내 안을 펼쳐봐 주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내 안에서
자신만의 문장을 찾아내 간직하기를 바란다.
- 로맨스는 별책부록 中
한 사람의 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언어를 익히지 못한 어린 날들도, 기억나지 않는 날들도, 지우고 싶어 수도 없이 지우려 했던 날들도 꼬박꼬박 한 페이지씩 누적된다. 모범답안처럼 쓰려고 또박또박 기록한 책도 있을 것이고, 너무 어려워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책도 있을 것이다. 물음표가 많은 책도 있고, 느낌표가 많은 책도 있으며, 여백이 많은 책도 있을 것이다. 더러는 기억에서 오랫동안 밀려나 바랜 책도 있을 것이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 기록된다고 하면 내 책은 만 페이지는 훌쩍 넘고 이만 페이지는 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접어둔 페이지도 있고 요란하게 밑줄을 그어 자주 회상하는 페이지도 있다. 수도 없이 지우려 했지만 지우려는 흔적만 애처롭게 남아 너덜거리는 페이지도 있고, 잔잔하고 부드러워 자꾸만 쓰다듬게 되는 페이지도 있다. 황홀하고 찬란했던 페이지, 아무렇지도 않고 특별하지 않았던 페이지, 너무 애쓰느라 고단한 노력이 연필 자국처럼 패인 페이지도 있다.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은 책을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출판사에서 실제로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저마다 다른 두께와 정서와 질감을 지닌 자기만의 인생 책을 차곡차곡 써 내려가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주인공 강단이(이나영 역)는 잠시 경력이 단절되었다가 다시 맨 아래부터 차곡차곡 올라가는 이야기를, 차은호 (이종석 역)은 오랜 사랑과 오랜 존경 이야기를, 김재민 (김태우 역)은 능청스럽고 유쾌한 듯 보이지만 치열하고 빼곡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각기 다른 장르의 책처럼 보여준다.
이 드라마를 몰입해서 보게 된 건 ‘책’이라고 하는 소재가 주는 친근함도 있지만 내가 일하는 작업실 근처에서 촬영한 장면이 많았던 이유도 컸다. 드라마의 주요 배경이 된 곳은 파주출판문화단지 내에 있는 ‘지혜의 숲’이다. 드라마에서는 이곳이 출판사로 나오지만 사실 지혜의 숲은 출판사 및 개인이 기증한 책, 가치 있는 책들이 천장까지 빼곡하게 꽂힌 공동의 서재이다. 나무로 된 마루와 곳곳에 놓인 푹신하고 좋은 의자들, 갈대샛강이 내다보이는 커다란 유리창이 무척 아름다운 공간이다.
거의 매일 출판단지를 산책하다 보니 나는 이 공간을 애용한다. 산책하다가 잠시 들러 이런저런 책을 둘러보기도 하고, 지혜의 숲 야외 데크에서 이어진 길을 따라 습지와 오솔길을 지나 작업실로 걸어오기도 한다.
출판단지가 자리한 곳은 문발동(文發洞)이다. 말 그대로 ‘글이 피어나는 동네’다. 개성 있는 출판사 건물들이 책울림길을 따라 서 있다. 출판단지를 가로지르는 습지를 사이에 두고 길은 회동길과 광인사길로 나뉜다. 회동길과 광인사길에 늘어선 출판사 건물 안에서는 강단이들이, 차은호들이, 김재민들이 뜨겁고 치열하게 글을 피워내지만, 겉에서 본 단지는 대체로 조용하다. 출판단지에서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주로 까치와 철새들 뿐이다.
단지 내에 고적한 습지, 갈대샛강이 있다. 갈대가 우거진 이 습지에 이따금 오리 가족이 지나간다. 봄에는 길에서 날아온 벚꽃잎이 흩날리고 여름에는 버드나무가 우거지고 가을에는 갈대가 흔들리고 겨울에는 바람이 머물다 지나간다. 고층 건물이 없어 하늘이 낮게 내려와 습지에 닿는다. 노을이 습지에 잠기기도 하고, 습지에서 날아오른 새들이 하늘에 담기기도 한다.
매일 같은 길을 걷지만, 내 삶의 산책 페이지가 같은 내용이었던 날은 하루도 없다. 진한 초록으로 익어가는 나무들 사이에서 우두커니 홀로 말라 죽은 한 그루의 나무를 한참 바라보았던 날도 있고, 마감이 임박한 원고를 두고 그 원고를 내야 할 출판사 앞을 초조하게 지나간 날도 있다. 함께 출근한 강아지와 더없이 느긋하고 유쾌한 산책을 했던 날도 있고, 아무 생각 없이 오직 걷기에만 전념했던 날도 있다. <로맨스는 별책부록> 드라마 대사처럼,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여태까지 읽어온 것들이 사실 오독이었음’을 문득 알게 된 날도 있다. 어떤 날이든,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날조차, 삶은 저 혼자 성큼성큼 걸어 내 생의 책을 만들고 있다.
이 책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페이지들을 품고 있는지, 언제 끝날지는 모른다. 다만, 책이 너무 엉망이지 않기를, 타인에게 칼이 되는 페이지가 많지 않기를, 찢어지고 너덜거리는 페이지들이 너무 많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언젠가 갈대샛강에서 저무는 저녁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던 적이 있다. 유난히 천천히 저무는 저녁이었고 어둠이 내려오자 가로등과 지혜의 숲에 따뜻하고 환한 불이 들어왔다. 저녁과 불빛과 바람이 아늑했던 그 날처럼 내 생의 마지막 페이지도 잔잔하고 평온하기를 바랄 뿐이다.
책울림길은 출판문화단지 둘레로 조성된 산책로다. 총 6.5km로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개성 있게 지은 출판사 건축물과 습지, 나무, 조용한 길이 어우러져 걷기 좋은 길이다. 갈대 샛강은 출판단지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습지다. 계절마다 철새가 날아들고 갈대와 나무가 우거진다. 드라마 배경이 된 ‘지혜의 숲’은 회동길에 있다. 휴관일을 제외하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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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여진
주중에는 주로 번역을 하고 주말과 휴일에는 산책 여행을 다닌다. 파주 ‘번역인’ 작업실에서 작업하면서 월간지에 여행 칼럼을 기고한다. 저서로 『토닥토닥, 숲길』, 『슬슬 거닐다』, 역서로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2』 외 수십 권이 있다.
사진. 백홍기
월간지 사진기자이자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회 ‘포토청’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사진디자인 석사 과정을 밟는 중이다. 저서로 『토닥토닥, 숲길』, 『슬슬 거닐다』가 있고 [아파트 연가]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 활동 및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