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95 · AUGUST 2026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웹진
연극 《눈이 부시게》 무대 위 한 장면 — 시계 문자판이 새겨진 어두운 바닥에서 노란 카디건 차림의 혜자가 맞은편에 선 젊은 여성을 향해 한 손을 들어 마주하고 있다
character · Character Trend

매체를 건너 다시 태어나는 얼굴, 《눈이 부시게》 혜자

당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Prologue

무대라는 압축된 공간은 텔레비전 드라마가 지닌 시간의 두께를 고스란히 옮겨낼 수 없다. 《눈이 부시게》의 연극화 역시 이 숙명적인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작업이었다. 서사는 축약되어야 했고, 몇몇 장면은 설명에 기대야 했다. 무엇을 덜어 내고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일이 각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렇게 비워 둔 자리를 끝내 채워준 것은, 배우의 힘이었다. 송옥숙의 혜자는 김혜자의 그림자를 좇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다시 쓴다.

CH 01A Question That Returns

2019년의 혜자와 2026년의 혜자, 다르지 않다는 것의 의미

매체를 건너도 변하지 않는 혜자라는 캐릭터

혜자라는 캐릭터는 매체를 옮겨 다니면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년의 여성이 시간을 거슬러 자신의 삶을 되짚는다는 서사의 뼈대는 브라운관에서도, 무대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놀라운 것은 이 변하지 않음이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혜자는 시대를 초월해 보편성을 획득한 캐릭터이기 때문에, 다시 쓰기보다 다시 비추는 쪽을 택해도 무방한 인물이다. 각색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내려놓은 것도 이 인물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2019년의 시청자와 2026년의 관객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고 있지만, 부모의 얼굴 뒤에 감춰진 또 다른 얼굴을 궁금해한 적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혜자는 특정한 연도에 속한 캐릭터가 아니라, 세대를 건너 매번 새로운 배우의 몸을 빌려 되돌아오는 질문 그 자체에 가깝다. 매스컴에서 연극으로 자리를 옮기며 달라진 것은 혜자라는 인물의 본질이 아니라, 그 인물을 담아내는 그릇과 그 그릇을 쥔 손이다. 혜자의 얼굴은 시간이 지난다고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그 얼굴을 비추는 조명과, 그 조명 아래 서 있기로 한 배우 쪽이다.

CH 02The Other Side of the Face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딸이었던, 우리가 다 알지 못한 얼굴

역할 뒤에 감춰져 있던, 달의 뒷면 같은 얼굴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얼굴을 마주하지만, 정작 그 얼굴의 주인이 온전히 누구인지는 끝내 알지 못한 채로 남는다. 어머니로서의 얼굴, 아내로서의 얼굴, 딸로서의 얼굴. 사람은 자신이 놓인 역할에 맞는 얼굴을 골라 세상에 내보이며 살아가고, 그 나머지 얼굴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누군가를 안다고 믿으면서도 실은 상대가 보여 주기로 선택한 얼굴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상대가 끝내 다 펼쳐 보이지 않는, 달의 뒷면과도 같은 얼굴을 영원히 궁금해하면서.

《눈이 부시게》 속 혜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특별해진다. 알츠하이머라는 병은 그녀에게서 평생 지켜 온 역할의 얼굴을 벗겨 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가족조차 알지 못했던 다른 얼굴들이 드러난다.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어머니를 자식은 비로소 이해하게 되고, 누군가에게 든든한 울타리였던 존재에게도 한때는 울타리가 필요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를 안다고 믿으면서도
실은 상대가 보여 주기로 선택한 얼굴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 담쟁이덩굴이 드리운 낡은 담벼락 앞에서 붉은 니트 조끼를 입은 김혜자의 혜자가 환하게 웃고 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 속 김혜자의 혜자© 사진 출처 표기 예정
CH 03An Era's Mother

우리 시대가 함께 기억해 온 얼굴, 김혜자의 '혜자'

시대가 공유해 온 어머니상으로서의 혜자

브라운관과 스크린과 무대를 통해 우리는 수없이 많은 어머니의 얼굴을 봐 왔다. 언제나 자애롭게 울타리가 되어 주는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어머니도 있고, 심지어는 나조차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도 있다. 배우 김혜자는 오랜 세월 이 다양한 어머니의 얼굴들을 연기해 왔고, 그 얼굴들은 어느새 우리 시대가 공유하는 하나의 어머니상으로 자리 잡았다. 《눈이 부시게》의 혜자는 김혜자가 그동안 쌓아 온 그 모든 어머니상의 총합이자, 어머니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딸이었고 아내였던 시절의 잔영까지도 함께 품은 캐릭터다.

드라마 속 김혜자가 보여 준 혜자는 따뜻하고 다정하며, 그 안에 소녀 같은 여림이 여전히 남아 있는 어머니였다. 부드럽고 순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숨겨 두었던 용기를 서슴없이 꺼내 드는 어머니. 바람에 몸을 눕히면서도 끝내 꺾이지는 않는 갈대와 같은 어머니상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 얼굴을 시대의 어머니로 여겨 왔다.

연극 《눈이 부시게》 무대 위 한 장면 — 미용실을 배경으로 데님 재킷을 걸치고 안경을 고쳐 쓴 혜자가 앞치마를 두른 여성, 곁에 웅크려 앉은 젊은이와 마주하고 있다
연극 《눈이 부시게》 무대 위 송옥숙의 혜자© 사진 출처 표기 예정
CH 04Rewritten on Stage

무대 위에서 다시 태어난 얼굴, 송옥숙의 '혜자'

무대 위에서 정면으로 다시 쓴 얼굴

무대 위 송옥숙의 혜자는 전혀 다른 결을 지닌다. 브라운관에서 송옥숙이 그려 온 어머니들은 대체로 자기 의견이 뚜렷하고,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악역을 자처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스스로 강해지기로 마음먹은 어머니, 꼿꼿한 등으로 울타리를 세우는 어머니, 그 등을 자식이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곧게 서 있는 어머니. 무대 위 혜자 역시 이 계보 위에 놓인다. 자신이 지나온 삶을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 삶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려 들지도 않는다. 대본의 행간에서 이런 얼굴을 발견하고 채워 넣은 것은 온전히 배우의 몫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층위가 열린다. 혜자가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다시 낯선 타인으로 인식해 가는 과정 속에서, 대상과 정은은 처음으로 그녀의 등이 아니라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저 차갑고 매정하다고만 여겼던 어머니가 실은 어떤 얼굴을 숨기고 있었는지, 나를 지켜 내기 위해 무엇을 견뎌 왔는지를 그제야 알게 되는 것이다.

송옥숙의 혜자는 드라마를 기억하는 이들의 예상에서도, 김혜자라는 거대한 원형의 그림자에서도 비껴선 자리에 서 있다. 그것은 오직 송옥숙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며, 동시에 혜자라는 캐릭터가 매체를 옮겨 다니며 왜 여전히 유효한지를 증명하는 얼굴이기도 하다. 2019년의 혜자와 2026년의 혜자가 결국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그 질문에 답하는 얼굴은 매번 다시 태어난다. 객석에 앉아 그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내가 쓴 인물을 처음 보는 사람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우리가 끝내 다 알지 못하는, 그러나 무대 위에서만큼은 마침내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얼굴로.

Writer
필자 박윤혜

박윤혜 Park Yun-hye

극작가·작사가, 음악극 《눈이 부시게》 각색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극학과에서 연극 이론과 드라마터지를 배우고, 동 대학원과 뉴욕대학교에서 뮤지컬 창작을 전공했다. 이야기를 해체하는 훈련을 먼저 받은 뒤에야 쓰는 일로 옮겨간 셈이다. 2022년부터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두 언어로 글을 쓰고 있다. 음악극 《눈이 부시게》의 무대화 각색을 맡았다. 대표작으로는 연극 《내일 바다에》, 뮤지컬 《푸른 잿빛 밤》과 《보이체크 인 더 다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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