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팅힐》의 명장면. 빌 위더스의 ‘Ain't No Sunshine’이 흐르는 동안 윌리엄(휴 그랜트)이 노팅힐의 포토벨로 거리를 걷는다. 1분 동안 날씨는 따뜻했다가 눈바람이 불었다가 다시 처음처럼 따스해진다. 변화에 맞춰 윌리엄은 재킷을 어깨에 걸쳤다가 서둘러 입고, 다시 벗는다. 단시간에 사계절이 지나간다. 배우 김고은을 생각하면 이 장면이 겹친다. 김고은의 특별함은 시간을 적층하는 데 있다. 화면에 잡힌 얼굴을 바라볼 때면 얼마나 오랫동안 한 친구를 애틋해했는지(《은중과 상연》), 세상의 편견과 맞서왔는지(《대도시의 사랑법》), 한 남자를 진심으로 좋아했는지(《유미의 세포들》)가 읽힌다. 다시 말해 지금의 감정에 이르기까지 인물이 살아온 시간을 함께 보여주는 능력이 김고은에게 있다. 그래서 지난 7월 31일 제5회 청룡시리즈어워즈에서 《은중과 상연》으로 대상을 받은 것이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했다. 32년에 걸쳐 교차한 두 여성의 역사를 담은 작품에서 김고은의 이러한 역량이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좋은 문학작품을 읽을 때와 비슷한 쾌감도 그에게서 받는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작가가 정확한 언어로 짚어줄 때 ‘내가 느낀 게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을, 김고은의 연기를 볼 때도 만난다. 삶이 저마다 다를지라도 공통으로 느끼는 희로애락을 이 배우는 또렷이 표현한다.
어느덧 데뷔 14년 차. 1200만 명의 관객이 본 《파묘》로 1990년대생 배우 최초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기록까지 세운 김고은이지만, 《은교》와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의 대중적 영향력이 큰 탓일까. 여전히 그를 향한 상찬은 소녀 같고 친근한 이미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이 글에선 김고은을 ‘시간을 적층하는 배우’로서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 관점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은중과 상연》, 《대도시의 사랑법》, 《유미의 세포들》을 놓고 보면 자연스러움이라는 말 뒤에 가려져 있던 배우 김고은의 공력이 드러날 것이다.

캐릭터의 삶 전체를 염두에 둔 역대급 액팅 차력쇼
드라마 《은중과 상연》
훌륭한 작품을 두고 ‘그 작품의 그 역할은 꼭 그 배우여야만 했다’고 결과론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뻔하나 그럼에도 말해야겠다. 《은중과 상연》은 김고은이 필요했고, 그가 류은중이어야만 했다. 요즘은 드문 느리고 긴 호흡의 15부작인 데다, 류은중은 32년간 이어진 두 친구 이야기의 주체다. 작품의 무게를 감당할 배우로 김고은보다 적합한 이를 떠올리기 어렵다.
《은중과 상연》 1화 마지막. 43살 드라마 작가 류은중(김고은)은 오래전 절교한 친구 천상연(박지현)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받는다. 안락사를 위한 스위스 여정에 동행해 달라는 부탁이다. “폭력적”이기까지 한 부탁을 다짜고짜 받은 상황에서 은중은 황당하다는 듯 실소하거나 고개를 돌리는 대신 상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김고은이 택한 건 즉각적인 리액션을 주지 않는 것이다. 놀람이나 거부감을 표정에 먼저 실어 보내는 대신, 몇 초간 정지 상태를 유지하며 상대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이 정지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청자는 오히려 은중의 내면에서 무언가 무너지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그 균열은 뒤늦게야 입술의 미세한 떨림과 붉어지는 눈시울로 새어 나온다. 감정을 먼저 보여주고 설명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 먼저 시간을 벌어놓고 그 침묵의 무게로 감정을 짐작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감정을 먼저 보여주고 설명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 먼저 시간을 벌어놓고
그 침묵의 무게로 감정을 짐작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이 재회 시퀀스는 국민학교 4학년 때 은중과 상연이 친구가 되기까지의 과정 다음으로 붙었다. 그러니까 이 사이에는 32년의 점프가 있다. 앞으로 두 사람이 어떤 일들을 거쳐 ‘동경과 질투, 선망과 원망이 얽힌’ 수십 년을 보내는지 시청자는 아직 모른다. 다만 현재 은중의 목소리로 다시 쓰인 어린 시절을 보며, 당시 늘 의기소침했던 은중이 “완전”해 보이는 상연에게 “넌 참 좋겠다”는 부러움을 품고 있었다는 것 정도를 알 뿐이다. 그런데도 김고은의 얼굴에서는 두 여자가 지난한 세월로 묶인 사이임이 읽힌다. 몇 초간의 침묵과 미세한 표정 변화만으로 아직 펼쳐지지 않은 두 사람의 시간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다.
《은중과 상연》 인터뷰에서 김고은은 “늘 전체를 염두에 두고 연기했다”고 말했다. 특정한 한 시기가 아니라,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복잡한 삶 전체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더불어 “《은중과 상연》은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한 송혜진 작가의 말도 새겼다고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작품 해석에 그치지 않고 연기 방식으로도 이어진다. 한 장면의 감정만 떼어내 표현하기보다, 32년 속에서 지금 은중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먼저 계산하고 그 위치에 맞는 만큼만 표현을 얹는 것이다. 상연을 떠나보낸 뒤 남겨진 은중의 얼굴로 작품이 끝나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옆모습만 짧게 비출 뿐인데도 서로를 받아줄 수 있는 건 서로뿐이었던 두 사람의 역사가 그 얼굴에 맺힌다.

매 순간을 치밀하게 설계하는 냉철한 전략가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13년이란 긴 시간을 다룬다. 여기서 김고은은 20살부터 33살까지, 자신과 같은 1991년생 여성, 구재희의 한 시절을 산다. 이 작품으로 김고은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시나리오를 읽으며 무엇보다 “13년간의 시간성이 먼저 다가왔다”고 말했다. 역시 전체를 본 것이다. 김고은은 재희의 삶을 몇 개의 구간으로 나눠 접근했다. 성인이 된 자유를 누리다가도 문득 공허함을 느끼는 20대 초반, 본격적인 취업 준비와 함께 인생의 방향을 찾느라 흔들리는 20대 중후반, 취직하면서 약간의 안정을 찾지만 다음 챕터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30대 초반까지 총 세 구간이다. 다만 그가 실제로 공들인 건 각 구간을 다르게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구간과 구간 사이의 이음새를 지우는 작업이었다. 걸음걸이, 웃는 강도와 말투 같은 미세한 요소들을 조금씩 조정해 가며 어느 한 시점에 확 달라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렇기에 구재희는 구간에 따라 다른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한 살 한 살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단 상영시간 2시간 안에서 말이다.
김고은은 재희가 ‘헤픈 년’이라는 낙인과 싸워온 세월도 함께 보여준다. 하고 싶은 건 다 해보자는 주의로 사는 재희는 늘 소문에 휩싸이고, 멋대로 재단되며 평가받는다. 낙태를 위해 찾아간 산부인과에서 잘못 살아왔다는 듯 말하는 의사의 태도에 참지 못하고 뛰쳐나와 오열하는 장면이 있다. 쭈그리고 앉은 재희는 동행한 친구 흥수(노상현)에게 “다들 왜 그렇게 쉽게 단정하는데?”라며 울부짖는다. 여기서 김고은은 퓨즈가 터지듯 감정을 한꺼번에 터뜨리길 택했다. 그동안 재희가 얼마나 많은 말과 시선을 견뎌왔는지가 단번에 전달된다. 이 신을 찍을 때 감정에 압도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대도시의 사랑법》 인터뷰에서 만난 김고은은 의외의 대답을 내놨다. “오히려 이성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강조를 줘야 하는 부분이니 강조한 것뿐”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감정을 가장 격하게 터뜨리는 순간조차 사전에 강약을 조절한 결과라는 뜻이다. 이 대답까지 떠올리면 김고은의 연기는 한 번 더 다르게 보인다. 예능이나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작품에서 보여준 서글서글하고 활발한 모습 때문에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배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냉철한 전략가에 가깝다. 돌이켜보면 그는 늘 해당 장면의 의도와 그 장면이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에 맞춰 연기했다고 답해왔다.
그의 자연스러움은 이야기의 구조와 인물의 변화를 치밀하게 설계하되,
그 설계의 흔적을 지운 결과에 가깝다.
김고은의 특징적인 연기를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자연스러움’이라는 말을 이 지점에서 다시 보게 된다. 그의 자연스러움은 대본 안에서 이야기의 구조와 인물의 변화를 치밀하게 설계하되, 그 설계의 흔적을 지운 결과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배우가 무엇을 하고 있다는 인상보다 인물이 실제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먼저 온다. 바로 이 점이 현재 김고은이 안정적인 주연 배우로 자리 잡은 이유일 것이다.

흐름에 맞춰 힘을 빼고 시간을 통과시키는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3》
《유미의 세포들》 시리즈는 작품의 길이나 장르적 성격에 있어 김고은의 시간을 적층하는 힘이 가장 돋보였던 작품이다. 2021년부터 2026년까지 이어진 총 3시즌으로, 30대 여성 김유미의 일상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김고은은 하루가 쌓여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쌓여 몇 달과 몇 년이 되는 일상의 흐름에 맞춰 힘을 빼고 연기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세수를 하고 버스에서 내리고 야식을 먹을 때 특별히 의식하지 않듯, 유미의 일상도 그렇게 흘러가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특별해 보이지 않는 행동과 반응이 쌓이면서 유미의 습관과 성격이 김고은의 몸에 새겨지고, 시즌이 거듭될수록 유미는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시즌2 이후 4년 만에 공개된 시즌3에서도 김고은은 첫 장면부터 김유미였다.
김고은은 연애의 역사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시즌2에서 헤어진 남자친구 유바비(박진영)와 연애 당시 자주 가던 카페 앞에서 재회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바비에게 “보고 싶었던 적 없다”고 말하는 유미의 목소리는 더없이 냉랭하지만 시선은 뜨겁다. 그리움과 원망, 재결합하고 싶은 마음과 그렇다고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마음이 동시에 드러난다. 늘 그래왔듯 김고은은 하나의 감정을 하나의 표정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옛 연인과 함께 보낸 시간까지 품은 듯 이 순간을 연기한다.
세 작품을 관통하는 김고은의 방법론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감정을 먼저 보여주는 대신 침묵으로 지연시키거나(《은중과 상연》), 매 장면의 위치를 생각하며 에너지를 배분하거나(《대도시의 사랑법》), 낮은 리액션을 켜켜이 쌓아 인물을 체화하는(《유미의 세포들》) 식으로, 그는 감정을 즉각 드러내지 않고 시간을 통과시켜 표현한다. 김고은의 특별함은 감정을 덜 느끼거나 덜 표현하는 데 있지 않다. 누구보다 뜨겁게 감정을 끌어올릴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언제 얼마나 보여줄지를 통제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의 연기는 자연스러우면서도 가볍지 않고, 즉각적으로 다가오면서도 오래 남는다. 인물이 살아온 시간을 얼굴과 몸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필요한 순간만 꺼내 보여주는 것. 김고은의 자연스러움은 본능이 아니라 오랜 시간과 치밀한 선택이 만들어낸 기술에 가깝다. 청룡시리즈어워즈 대상 수상소감에서 김고은은 “더 열심히 할 테니 더 많은 기회를 달라”고 말했다. 14년 동안 인물의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온 배우가 여전히 다음 역할을 기다리고 있다. 김고은의 얼굴에 또 어떤 시간이 쌓일지 궁금해진다.

이유채 Lee Yu-chae
《씨네21》 기자
영화 주간지 《씨네21》 기자로 영화와 드라마, 그 안에서 시간을 쌓아 가는 배우들에 관한 글을 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