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람 맞아? 과거에 연예인들에게 이런 반응은 부정적인 의미가 강했다. 사람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 강했고 따라서 그걸 벗어나면 ‘이중적’이라는 비판이 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경향은 사라지고 있다. 사람은 특정 상황에서 나오는 다양한 가능성의 얼굴들을 갖고 있다는 ‘멀티 페르소나’ 개념이 정착하게 되면서다. 이 개념은 미디어 생태계가 지상파와 케이블, 종편 같은 레거시 미디어에서 웹으로 옮겨가면서 더욱 본격화됐다. 지상파에서 정해진 틀 안에서 보수적으로 요구되던 ‘하나의 얼굴’은 보다 표현이 자유로운 웹으로 와서 돌발적인 상황이 만들어 내는 ‘다양하고 매력적인 얼굴’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본캐만으로 활동했던 연예인들에게 이제 허용된 다양한 ‘부캐’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캐릭터 서사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팬덤의 동참으로 의도치 않게 발견되거나 때론 의도적으로 발굴해 내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입담만 좋은 줄 알았는데 노래도 요리도 하네
본캐를 깨고 쏟아져 나온 부캐들
무엇이 새로운 얼굴을 꺼내게 만들었을까. MBC 《놀면 뭐하니》의 초창기 시절, 유재석이 유산슬, 유고스타, 라섹, 유드래곤, 지미 유 같은 다양한 부캐들을 양산했던 사례가 그 이유를 정확히 보여 준다. 어느 날 갑자기 트로트 작곡가를 찾아가게 된 유재석이 거기서 일종의 ‘특훈’을 받더니 곧바로 곡을 받아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는 놀라운 과정이 공개된 것이다. 불가능할 것이라 여겨졌지만 그 돌발 상황에서 의외의 재능을 꺼낸 유재석은 〈합정역 5번 출구〉, 〈사랑의 재개발〉 같은 히트곡을 실제 차트에 올렸다. 아직 열어 보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드럼을 치며 밴드 공연을 하고, 라면 요리로 가게를 오픈하고, 여름 가요시장을 강타하는 혼성 그룹 활동을 하는 등 유재석의 부캐는 당시 유튜브를 중심으로 본격화되고 있던 웹 예능 시대의 새로운 캐릭터 활동 방식을 예고했다.
레거시 미디어의 본캐를 깨는 다양한 부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운동하기 싫어하는 뚱뚱한 예능인’이라는 본캐의 설정으로 《오늘부터 운동뚱》에 출연해 강제로 헬스장에 끌려간 개그우먼 김민경은 체스트 프레스 80kg, 레그 프레스 340kg을 가뿐히 해 내는 경이로운 신체 능력을 보여 주며 다양한 부캐를 탄생시켰다. ‘태릉이 놓친 인재’로 불리며 ‘민이슨(민경+타이슨)’, ‘척추요정(필라테스 능력자)’ 같은 부캐를 탄생시킨 김민경은 2022년 실제 사격 국가대표로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 줬다. 평소 먹는 걸 좋아하던 가수 성시경은 《먹을 텐데》라는 웹예능으로 먹방을 선보이며 전국 맛집의 새로운 지도를 그려 놓았다.

이 웹예능의 성공으로 그는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 상(마츠시게 유타카)과 함께 넷플릭스 예능 《미친 맛집》을 찍기도 했다. 노래 실력만큼 운동에 진심이던 김종국은 《짐종국》을 통해 운동 마니아로서 자신의 부캐를 완성했고, 애주가로 유명한 신동엽은 《짠한형》이라는 웹에서나 가능한 술방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유재석 역시 《핑계고》라는 웹예능으로 입지를 넓혔고, 여기서 파생한 《풍향고》 같은 여행 예능을 통해 배우 이성민이 인간 내비게이션 ‘맵성민’이라는 부캐를 탄생시키게 했다. 또 카더가든은 자신의 웹예능 《카더정원》을 통해 빵빵 터지는 순발력 좋은 입담으로 팬들을 끌어모으더니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로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이 밖에도 소식좌로서의 새로운 먹방 캐릭터를 탄생시킨 《밥맛없는 언니들》의 박소현과 산다라 박, 자신의 본캐인 축구에 대한 진심을 담은 《안정환19》의 축구 전설 안정환, 단순한 B2B 커머스와 브랜드 마케팅의 차원을 뛰어넘어 소비자 혜택을 담판 짓는 협상가로 캐릭터를 구축한 《네고왕》의 황광희 등등 이제 부캐가 본캐를 압도하는 멀티 페르소나의 시대가 열렸다.
가짜가 아닌 또 다른 진짜 나의 모습
진정성이 만든 또 하나의 진짜
대중이 이처럼 본캐에서 확장된 새로운 부캐에 열광하게 된 데는 멀티 페르소나가 일상적 삶의 방식으로 자리하게 된 현실과 맞물려 있다. 워라밸을 임금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현 세대들은 퇴근 후 또 다른 자신을 누리는 데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퇴근 후 밴드를 하거나, 스킨 스쿠버를 배우고, 사교댄스를 하는 등 일 바깥의 삶이 그만큼 중요해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러한 일 바깥에서 자신이 좋아하게 된 부캐 활동이 어느 순간에는 본캐가 되기도 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저 일로서 하는 것과 진짜 좋아서 하는 것이 주는 차이가 들어 있다. 이제 소비자들은 무언가를 소비하는 데 있어서 그 대상에 담긴 진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 가짜가 아닌 진짜를 소비하고 싶은 것이다.
부캐는 그런 점에서 보면 본캐의 가면 아래 숨겨진 또 다른 진면목에 가깝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사회적 가면[페르소나]을 쓰게 마련이지만, 그것이 그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 고정된 틀을 벗어나 가능성의 지대에 자신을 던져 넣음으로써 우리는 또 다른 진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개념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부캐를 찾아나가기 시작한 소비자들은 이제 콘텐츠 속에서도 진정성이 담긴 부캐를 단박에 구별해 낸다. 부캐의 시대가 오히려 요구하는 건 그래서 더 깊은 진정성이다.
부캐는 그런 점에서 보면 본캐의 가면 아래 숨겨진
또 다른 진면목에 가깝다.
부캐의 시대가 오히려 요구하는 건 더 깊은 진정성이다.

현 시대의 대중들은 완벽하게 꾸며진 동경의 대상이 아닌, 화려한 과대 포장을 벗겨 낸 후 보이는 꾸밈없는 날 것의 진정성에 친밀감과 유대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의 캐릭터로 성장하는 과정에 자신들도 참여하고 싶어 한다. 캐릭터의 서사가 일방적으로 만들어져 전달되는 게 아니라 대중들과의 교감을 통해 함께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웹예능은 하나의 콘텐츠라기보다는 함께 만들어 가는 세계관이 된다. 그리고 이 세계관 안에서는 빈구석이 많은 캐릭터일수록 팬들이 참여할 여지를 많이 주는 강점이 된다.
완벽함 대신 솔직함이, 일방적 전달보다는 수평적 소통이
수평적 소통이 여는 캐릭터 IP의 시대
미디어 권력은 이미 대중의 손에 넘어간 지 오래다. 이 변화된 시기에 기존의 확고한 사회적 직업과 이미지를 가진 연예인들의 완벽주의는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대중이 요구하는 건 압도적인 전문성이나 세팅된 연출이 아니라 낯설고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자신을 기꺼이 던질 수 있는 유연함과 사람 냄새 나는 솔직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캐릭터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 동참하려는 대중들은, 연예인들이 그들의 피드백을 수용해 세계관을 넓혀 가는 수평적 소통을 원한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건 ‘무해한 솔직함’이다. 기존의 사회적 가면을 자연스럽게 벗고 진솔하게 자신의 진짜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솔직한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낸다고 해서 과도해지거나 방송으로서의 선을 넘는 건 피해야 할 일이다. 즉 가면을 벗는 부캐의 새로운 페르소나라고 해도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사회적 가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자칫 선을 넘는 자극적인 부캐는 오히려 대중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켜 본캐까지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윤리적 기준선을 상실한 말초적 자극은 시청자들의 피로도를 높이고 애써 쌓아 올린 팬들과의 관계를 단숨에 파탄낼 수 있다.
이제 웹예능이 레거시예능을 압도하는 상황이다. 웹예능이 탄생시킨 작은 부캐가 본캐가 되어 보다 큰 미디어 속으로 들어오는 역전이 생겨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제 부캐는 일종의 ‘캐릭터 IP’ 차원에서 관리되어야 한다. 자신에게 어떤 다양한 면들이 있는지 들여다보고 아직 발굴되지 않은 가능성의 캐릭터들을 특정 상황 속에서 찾아 나가는 노력이 필요해진 시대다.

정덕현 Jung Deok-hyun
대중문화평론가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각종 방송 활동과 강연 등을 통해 대중문화가 가진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알리고 있다. 백상예술대상, 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 《드라마 속 대사 한 마디가 가슴을 후벼팔 때가 있다》,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