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95 · AUGUST 2026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웹진
안개 낀 밤, 필름 릴이 달린 구형 영화 카메라가 조명 받은 단상에 놓이고, 창문처럼 빛나는 거대한 격자형 스크린 벽을 향해 필름 스트립이 길처럼 뻗어 있는 일러스트
network · Local Stage

콘텐츠 포식자에 대항한 생존의 역사

글로벌 빅테크 플랫폼 시대

01 Chapter
When the Golden Age Broke

무너진 황금기, 자본의 폭주와 창작자의 연대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가 남긴 교훈

할리우드 영화 《바빌론(Babylon, 2022)》은 1920년대에서 1930년대로 넘어가는 할리우드의 황금기이자 격변기를 그렸다. 화려한 스크린 이면에 숨겨진 거대 자본 중심의 제작 시스템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기술 변화 속에서 창작자들이 어떻게 소모품처럼 다뤄졌는지, 그리고 이윤을 위해 범죄 조직과도 손잡는 모럴 해저드까지 영화 산업의 역사적 명암을 가장 원색적이고 강렬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사막 한가운데의 촬영장에서는 수십 편의 영화가 동시에 촬영되고, 대규모 전쟁 신을 찍는 현장에서는 배우와 스태프의 부상이 속출해도 컷 없이 촬영이 이어진다. 무더위에 밀폐된 녹음실에서 음향 감독이 죽어가도 누구 하나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렇게 폭주하던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을 제어한 것은 약자였던 창작자들의 연대와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었다.

할리우드 전성기의 스튜디오 시스템(Hollywood Studio System) 시대-1930~40년대 파라마운트, MGM, 워너브러더스, 폭스, RKO 픽처스 등 5대 메이저 스튜디오가 구축한 비즈니스 모델-에는 거대 영화사들의 절대적 권력과 부당한 착취에 맞서 배우들이 스스로 권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 영화배우 노동조합(SAG, Screen Actors Guild)’을 결성했다. 초기 영화사들은 SAG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스타 배우들이 대거 파업에 동참하자 결국 백기를 들었다. 1937년 스튜디오들은 마침내 SAG를 공식 노동조합으로 인정하고 단체 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뿐 메이저 스튜디오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미국 정부도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당시 할리우드 메이저들은 제작·배급·상영(극장)을 모두 소유하는 수직 계열화 구조였다. 5대 메이저 스튜디오는 직접 영화를 만들고 자기 배급망으로 유통하고 자사 계열의 극장 체인에서 상영했다. 스튜디오가 제작한 여러 영화를 극장에 묶어 한꺼번에 계약하도록 강제한 ‘블록 부킹(block booking)’, 이른바 끼워 팔기와 완성되지도 않은 영화를 사전 정보 제공 없이 미리 계약하도록 강제한 ‘블라인드 바이딩(blind bidding)’이 관행이었고, 독립 제작사와 독립 극장은 좋은 개봉관·시간대에서 원천 배제되었다. 이에 1948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수직 통합 해체와 반경쟁적 배급 관행 금지를 명령했다. 이른바 ‘파라마운트 판결’이다.

수직 통합 구조가 해체되면서 안정적인 수익원을 잃은 스튜디오들의 경영이 위축됐고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시스템은 붕괴했다. 여기에 TV 시대가 열리며 1950~60년대 극장 영화의 인기가 하락해 관객 수가 급감했고, 극장을 매각한 스튜디오들이 제작을 축소하면서 미국 영화 산업은 양적으로 크게 침체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 많은 독립 제작자들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고, 덕분에 기존 영화 문법에서 벗어난 독특하고 작품성 있는 영화들이 만들어지며 미국 영화는 문화적 다양성 속에서 크게 진보했다. 콘텐츠 산업은 다양한 제작·유통 환경이 조성되어야 비로소 창작의 공간이 열리는 법이다.

02 Chapter
A Familiar Story, Everywhere

어디에든 일어나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

딸기 주스와 하청 공장이 말하는 플랫폼 포식의 우화

딸기 주스를 만들어 파는 개인 사업자 A가 있다. 그는 제철에 수확한 국내산 딸기로 첨가물을 일절 넣지 않고, 자신이 개발한 독특한 비법으로 소비자의 입맛과 건강을 생각한 양심적인 ‘명품 딸기 주스’를 만든다. 딸기가 제철인 봄부터 여름까지만 한정 생산해 매번 전량 매진을 기록하고, 가을과 겨울에는 더 완벽한 주스를 위한 연구에 몰입하는 자부심 가득한 인물이다.

자본이 부족해 자체 생산 시설이 없던 A는 해썹(HACCP) 인증을 받은 국내 식품 제조사 B와 손잡고 국내 최대 온라인 쇼핑몰 C에 입점해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 주문이 급감하는 이상한 현상을 마주한다. 원인은 쇼핑몰 C의 무자비한 ‘포식자 전략’이었다. C 쇼핑몰은 A의 판매 데이터를 독점한 채 알고리즘을 이용해 A의 충성 고객들에게 자사 유사 PB(Private Brand) 상품을 상위에 노출하고 할인 쿠폰을 살포하며 A 상품을 대체했다. A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따라 실패 리스크를 없애고, A가 일군 시장과 고객을 고스란히 가로챈 것이다. 신선 식품 특성상 재고를 쌓아 둘 수 없었던 A는 눈물을 머금고 손해를 보며 재고를 떨이로 밀어내다가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 또 다른 사업가 B가 있다. 평생 과일과 야채를 착즙하는 비법만을 연구해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최상의 천연 과즙 음료를 구현해 내는 식품 생산 공장의 대표다. 봄의 딸기, 여름의 복숭아와 수박, 가을의 포도와 사과, 겨울의 감귤까지 그의 손을 거치면 어떤 음료든 초대박 상품이 되는 마법 같은 기술을 지녔다.

어느 날, 고급 세단을 타고 C 쇼핑몰의 임원이 공장을 찾아왔다. 그가 탁자 위에 놓인 음료 몇 가지를 가리키며 묻는다. “이거 여기서 만든 거 맞죠? 재료를 대줄 테니 이와 똑같이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B는 식품 첨가물을 조금만 섞으면 각 제품에 걸린 특허를 교묘히 피해 비슷한 맛을 낼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임원은 기존 생산 단가보다 20%를 올려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으로 B를 설득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B는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C 쇼핑몰의 PB 상품 납품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몇 년간 C 쇼핑몰의 든든한 협력 업체로 순항하는 듯했던 B에게 청천벽력 같은 통보가 날아들었다. 사전 협의도 없는 ‘생산 단가 50% 삭감’ 통보였다. B는 격분하며 반발했지만 이미 과거 B에게 생산을 맡겼던 수많은 독립 브랜드들은 C 쇼핑몰의 잠식에 밀려 자취를 감춘 뒤였다. 이제 C 쇼핑몰의 PB 상품을 만드는 일만이 B에게 남은 유일한 생존의 길이었다.

03 Chapter
Netflix, the New Studio System

넷플릭스라는 이름의 新스튜디오 시스템

데이터와 자본을 쥔 빅테크가 되풀이하는 포식 구조

오늘날 미디어 산업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이와 정확히 닮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거대 자본과 소비 데이터를 독점한 빅테크 플랫폼은 혁신을 일군 창작자(A)에게는 저작권 매절을 강요하고, 탁월한 제작 역량을 지닌 파트너(B)는 단순 하청 기지로 전락시키며 초과 이익을 독점하는 새로운 산업 지형을 구조화하고 있다.

이런 구조는 역사의 거울에 비춰 볼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과거 할리우드 황금기를 지배하던 스튜디오 시스템의 행태와 오늘날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초거대 빅테크 콘텐츠 플랫폼의 시장 지배 모델은 놀라울 정도로 맞닿아 있다. 두 시스템 모두 ‘막대한 자본을 앞세운 시장 지배력’과 ‘정보의 비대칭성’을 십분 활용해 리스크는 약자에게 떠넘기고 성공에서 오는 초과 이익은 온전히 독점하는 포식 구조를 되풀이하고 있다.

2025년 4분기 실적 발표에 따르면 넷플릭스는 전 세계적으로 3억 2,500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했다. 콘텐츠 투자 규모도 2024년 약 160억 달러(약 21조 원)에서 2025년 약 180억 달러(약 24조 원)로 해마다 늘고 있고, 연간 마케팅·광고 지출액도 약 29억 달러(약 4조 원)로 추정된다. 이런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넷플릭스는 허약한 제작사나 창작 욕구에 불타는 창작자들에게 ‘글로벌 흥행’과 ‘제작비 확보’라는 미끼를 던져 거절하기 어려운 일방적 매절 계약을 맺고 영구적 원청-하청 구조를 완성했다.

04 Chapter
Solidarity and Regulation

연대와 규제, 창작 생태계를 지키는 법

창작 생태계를 지키기 위한 연대와 제도적 방어막

미디어 산업의 역사에서 ‘새로운 기술과 거대 자본’의 등장에 따른 산업 생태계 재편은 언제나 창작자들에게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이자 동시에 새로운 창작 공간이 열리는 기회였다.

하지만 지금의 양상은 과거와 사뭇 다른 것 같다. 글로벌 빅테크의 영향력은 전 세계에 미치고 있어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는 창작자들의 연대를 어렵게 만들고, 개별 국가 단위의 행정만으로는 의미 있는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수준을 넘어섰다.

“외계인이 침공하면 일본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는 옛 정치인의 어록이 떠오른다. 이제는 방송과 같은 전통적인 저작권 이용자들도 창작자, 저작권자들과 연대해야만 한다.

국가 차원의 콘텐츠 산업 보호 규제도 시급하다. 유럽은 ‘EU 시청각 미디어 서비스 지침(AVMSD, Audiovisual Media Services Directive)’을 만들어 유럽에서 서비스하는 스트리밍 플랫폼이 유럽 제작 콘텐츠를 최소 30% 편성하도록 의무화했다. AVMSD는 무한한 자본을 앞세운 글로벌 OTT가 유럽 시장을 완전히 잠식하는 것을 막고 레거시 미디어와 현지 창작 생태계가 최소한의 방어막과 자금줄을 확보하도록 만든 성공적인 디지털 주권 수호 규제 모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유럽이 강력한 ‘편성 쿼터제’와 ‘직접 투자’를 법으로 강제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디지털 수출 주도형 국가라는 경제적 특성과 국내 OTT의 글로벌 경쟁력 약화에 대한 우려 사이에서 균형을 찾느라 규제에 다소 신중한 편이다. 하지만 빅데이터 알고리즘과 거대 자본에 의해 국내 미디어·창작 생태계가 복원 불가할 정도로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기금 분담·저작권 투명성 강화·홀드백 규정 등 실질적인 공정 거래 및 상생 장치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Writer

여도관 Yeo Do-gwan

한국방송협회 기획심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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