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의 서재는 탤런트, 성우, 코미디언 등 방송실연자의 다양한 감정과 영감, 창의력에 도움이 되는 양서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소설, 산문, 시, 인문학서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이 방송인 여러분에게 반짝이는 뮤즈가 되어 주길 기대합니다.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이와 같은 당혹감과 중대한 문제에 대해 이 책은 어떤 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한 답은 일상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다수가 동의해야 하고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실천적 문제이다. 이것은 결코 이론적으로 고찰하거나 한 사람의 의견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해결책만이 있는 양 이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가장 최근에 가진 경험과 공포를 고려해 인간 조건을 다시 사유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사유의 문제이다. 사유하지 않음, 즉 무분별하며 혼란에 빠져 하찮고 공허한 ‘진리들’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제안하는 것은 단순하다. ‘우리가 활동적일 때 우리가 진정으로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사색해 보는 것이다. ”


인간에 관해 깊은 성찰을 하고 싶은 이들에게

평생 살면서 ‘인간’ 존재에 관한 책 한 권을 읽어야 한다면 주저 없이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꼽고 싶다.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야스퍼스와 아인슈타인의 지적인 대화 동료였던 한나 아렌트의 이 책은 쉽지 않다. 읽는 내내 괴로울 정도로 어려운 사유와 철학이 이어지지만 그 단단함과 뻑뻑한 무게감이 ‘인간’과 ‘인간의 조건’에 관해 평생 고민하고 생각할 화두를 남겨준다.

이 책에서 말하는 조건은 인간다움을 위해 갖춰야 할 자격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조건 condition이다. 아렌트는 인간이 노동 labor과 작업 work과 행위 action를 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생명 유지의 수단으로써 노동은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필연성으로 인간의 신체조건과 성장에 부합하는 활동이다. 인간은 또한 작업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작업은 도구를 활용하고 무언가를 제작하는 인간 고유의 활동으로 일련의 작업을 통해 인위적인 사물을 세계에 제공한다. 행위는 노동이나 작업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한 인간의 활동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은 여러 인격이 공존하는 공적 영역에서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정치적 존재가 된다.

이 몇 줄의 말로 『인간의 조건』을 소개할 수는 없다. 활동적 삶과 관조적 삶, 영원성과 불멸성,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악과 선 등 깊은 사유의 골짜기에서 길을 잃어야 이 책을 통과할 수 있다. 스푸트니크에서 시작해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의 말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때보다 활동적인 적이 없으며, 그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롭지 않은 적은 없다”로 끝나는 이 책의 어딘가에서 당신이 길을 잃길 바란다. 그리고 길을 찾길 바란다. 철학과 역사에 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하기에 쉽지 않은 여정일 것이다. 책이 어렵다면 해설서를 함께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카마사 마사키의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을 추천한다. 또한 『인간의 조건』 여정을 마쳤다면 ‘악의 평범성’이라고 하는 빛나는 통찰력을 보여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여정을 이어가길 바란다.
한나 아렌트 지음 | 이진우 역 | 한길사 |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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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T
라비 알라메딘

“이 티셔츠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친구인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 씨한테 받은 것. 가타카나로 ‘나무늘보’라고 쓰여 있다. 쓰여 있지 않았더라면 나뭇가지에 매달린 이 생물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미즈마루 씨는 곧잘 이런 수법을 썼다. 닮은 그림을 그려도 별로 당사자와 닮지 않아서 옆에 ‘미야모토 다케조’라든가 ‘링컨’이라고 이름을 써둔다. 일단 이름이 옆에 있으면 “그러고 보니 미야모토 다케조네”, “아, 확실히 링컨이네!”하게 되니 신기하다. 생각해보면 미즈마루 씨는 참으로 특수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쨌든 이것은 ‘나무늘보’입니다. 이 티셔츠를 입고 있으면 반드시 여성들에게 “우아, 귀엽다!”하는 소리를 들을 겁니다. 입은 적 있냐고요? 아직 없습니다. ”


무언가에 ‘꽂힌’ 사람들을 위한, 『무라카미 T 내가 사랑한 티셔츠』

하루키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양이든 시계든 이데올로기든 그의 회로를 거치고 나면 매혹적인 이야기 한 편이 탄생한다. 그가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은 이 책에도 잘 드러난다. 흔하디흔한 ‘티셔츠’ 하나로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는 티셔츠의 컬러와 디자인만큼이나 다채롭다. 이 책에서 말하는 티셔츠는 은유로서의 상징물이 아닌 우리가 아는 그 티셔츠가 맞다. 그는 여러 의류 중 유독 티셔츠를 편애한다. 그리고 그가 소장한 모든 티셔츠에는 사연이 있다. 잊지 못할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티셔츠, 마라톤 대회에서 입었던 티셔츠, 새겨진 문구가 마음에 들어 구매한 티셔츠 등 티셔츠 한 장 한 장마다 그의 사소한 생각과 일상이 담겨 있다. 어떤 이야기는 하도 시시해서 피식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는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나도 서핑을 한 번 해볼까?’ 라든가 ‘그 재즈 음악을 꼭 들어봐야지’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알록달록하고 유쾌한 디자인의 티셔츠를 한 장 한 장 볼 때마다 하루키의 가벼운 농담과 시시한 일상, 근사한 음악과 열정적인 운동 에너지를 만날 수 있다. 어떤 사물에 매료되어 그 사물을 수집하게 된다면 모은 물건마다 나만의 시시하고 소소한 사연들을 기록하는 건 어떨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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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의 순간들
배수아

“은둔할 수 없다면, 집이 아니다. 은둔할 수 없다면, 여행이 아니다. 베를린은 내 인생의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시작된 도시이다. 내가 그것과 비로소 만난 도시이다. 베를린은 그것을 내게 주었다. 하지만 나는 베를린을 좋아지 않으며, 언젠가 베를린을 떠날 수 있기를 남몰래 소망한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베를린에 올 일이 없게 되고 마침내 베를린을 영영 잊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베를린에 두고온 가방이 있더라도.
베를린에 죽은 자를 두고 왔더라도.
그리고 베를린에서 연인과 재회했다 할지라도.”


매혹적이고 쓸쓸한 사유를 만나고 싶은 이들에게, 『작별의 순간들』

견딜 수 없이 쓸쓸하고, 참을 수 없이 매혹적인 작가, 배수아의 산문이다. 배수아 작가는 한국에서는 주로 번역을 하고 독일 베를린에서는 주로 글을 쓴다. 그가 글을 쓰는 공간은 작은 정원이 딸린 오두막이다. 이 책은 그 정원과 오두막이라고 하는 공간에서 발생한 사유들이다. 정원에 떨어진 한 조각 빛, 해질녘 화단에 펼쳐진 하나의 장면, 까마귀, 구름, 산딸기, 안개, 편지 그리고 집주인. 지극히 짧은 어떤 순간, 지극히 평범한 어떤 장면에서 시작한 그의 관찰과 사유는 그에게 ‘일생 동안 지속되는 내면의 사건’ (따옴표로 표기한 부분은 배수아 작가의 말)이 되어 우리에게 낯선 화법으로 말을 건넨다. 어느 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느리고 깊은 생각들은 짧은 호흡까지도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자로 옮겨져 마지막 페이지까지 푹 빠지게 만든다. 빵을 먹는 장면조차 어느 천재 화가가 그린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의 사색은 읽는 이들을 단숨에 매혹시킬 것이다. 배수아 작가는 한국에 머물 때 가끔 낭독회를 한다. 기회가 되면 배수아 작가의 낭독회도 꼭 참석해보길 바란다. 책에 박제된 문자들이 서늘한 언어가 되어 온몸으로 파고드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배수아 저 | 문학동네 |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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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여진

insta @didibydidi email didibydidi@gmail.com ——— 읽고 또 읽고 걷고 또 걷는다. 번역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책을 읽고 무수한 길을 걷는다. 책에서 만난 새로운 길을 이야기하고, 길에서 만난 새로운 사색을 글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