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에게는 특유의 공기가 있다.
수많은 인물이 배우의 몸과 영혼을 통과하며 남긴 무수한 흔적.
수많은 삶이 희로애락을 그리다 빠져나간 자리, 그 자리에 풍기는 특유의 공백감.
문래동 작은 카페로 세 배우가 들어왔다.
배우들 주위에는 저마다 다른 공기가 번져 있었다.
늙고 싶지 않았던 연구자, 혀 짧은 수감자, 냉혹한 권력자 등 여러 인물이
그 공기 속에 어른거렸다.
차가운 커피를 주문하고 대화를 시작했다.
김태우 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동기예요. 한 기수가 35명밖에 되지 않다 보니 당연히 가까울 수밖에 없는 사이죠.
유태웅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요. 여전히 연기에 푹 빠져 사는 재밌는 친구들이죠.
김태우 태웅이 같은 경우는 누가 봐도 배우였죠. 정말 잘 생겼잖아요. 반면 저는 누가 봐도 연출 전공처럼 생겼고요.
유태웅 호산이는 기타 하나로 과를 평정했어요. 기타를 정말 멋지게 치는 친구였죠.
박호산 태우는 우리 동기 중 제일 재밌는 친구예요. 입담도 상당하고요. 그런데 남들은 태우의 그런 모습을 모르니 태우가 연기를 잘하긴 정말 잘하죠.(웃음)
김태우 저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배우를 꿈꿨어요. 배우가 되어 지금도 꿈을 매일매일 실현 중이니 감사하고 만족합니다.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이 일에서 아직도 선택된다는 사실이 특히 감사하죠.
유태웅 저는 배우라는 단어만 들어도 아직 가슴이 떨려요. 그만큼 이 일을 좋아해요. 하지만 이 직업을 통해 가정을 꾸려야 하기에 부담도 크지요. 태우 말대로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아서 조용히 사라지는 배우도 많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여전히 배우로 활동하고 연기를 계속한다는 점만으로도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선택받기 위한 고뇌와 노력은 배우의 몫이지요.
박호산 저는 배우도 노동자라고 생각해요.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특히 감정 소모가 무척 많은 감정 노동자예요. 그런데 그 고된 노동을 즐기며 할 수 있으니 좋은 직업인 셈이죠. 물론 안정되지 않은 직업이지만 딱히 정년이 없는 직업이기도 하고요. 연기를 하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언제까지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박호산 그런 생각 많이 해봤어요. 그런데 정말 막막하더라고요. 배우가 아닌 제 모습은 도통 떠오르지 않아요. 문득 드는 생각인데, 운동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아니면 중학교 선생님을 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김태우 저는 셋 중에서 배우로서 재능이 가장 없는 사람이에요.
유태웅, 박호산 (야유를 보내며) 김태우 배우!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김태우 정말이에요. 저는 제가 배우로서 재능이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만 성실한 편이어서 그저 열심히 할 뿐이죠. 성실성을 고려하면 공무원도 어울릴 것 같지만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제 꿈은 배우였어요. 잘할 수 있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어요.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서 참 다행이에요. 호산이 얘기 듣다가 문득 떠오른 직업이 있긴 한데, 아마 저도 운동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초등학교 때 키가 이미 180cm가 넘어 핸드볼 선수를 했어요. 핸드볼 전국대회 준우승까지 한 적이 있지요.
유태웅 저도 막막해요. 배우가 아닌 저는 떠오르질 않네요. 저 역시 고등학교 때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고 대학도 관련 학과로 진학해 계속 그 길로 걸어왔어요. 다만 배우로 살아갈수록 무게가 점점 더해진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네요.
박호산 대부분 좋아하는 길을 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다들 좋아하는 길을 선택해 그 길을 걸어온 거고요.
박호산 저는 연기란 인문학적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이해의 폭이 상당히 넓어야 하는 장르죠. 단순히 어떤 인물을 표현하는 게 전부가 아니에요. 가령 문래동 카이스트는 단순히 혀 짧은 연기만 준비하는 게 아니거든요. 짧은 혀가 그 사람의 인생에 미친 영향을 고민하고 접근하죠. 그런 면에서 보면 연기는 폭넓은 인문학적 접근이 필요한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유태웅 연기란 상당히 열린 마음이 필요한 일이에요. 배우의 영감과 상상력도 중요하지만 막상 현장에서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다 보면 많은 부분이 달라지거든요. 캐릭터에 대한 베이스는 연구하지만 다른 배우와 호흡을 통해 입체적으로 다듬어야 하는 부분이 많아요. 그러려면 유연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혼자 캐릭터를 완성해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작품 속에서 만들어가는 과정이 연기니까요.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제 연기를 어떻게 할까에 많이 골몰했다면 요즘은 상대를 어떻게 받아줄까를 많이 고민해요.
김태우 몇 마디 말로 정의하긴 힘들어요. 몇 날 며칠 밤새워 이야기해도 모자랄 거예요. 가볍게 말하자면, 연기란 다른 이름, 다른 삶을 살아온 다른 영혼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배우는 새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매번 맨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요. 새로운 연구, 새로운 노력을 통해 새 인물을 만들어가야 하죠. 이 모든 과정이 작품마다 새로 시작되니 무척 고통스러워요. 정말 지독한 고통이죠. 하지만 너무 좋아하는 일이다 보니 번번이 그 고통에 빠져요. 아직도 새 작품을 받을 때마다 두렵지만 그 고통과 두려움마저 제가 사랑하는 일 일부라고 생각해요.
김태우 제 아내는 저에게 1년 중 360일은 일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요. 일할 때만 제 눈이 반짝인데요. 딱히 취미랄 것은 없어요. 즐기는 일이라고는 야구장 가서 야구 보는 정도? 원래는 두산 골수팬인데 아주 가까운 친구가 키움 히어로즈 감독이 되는 바람에 계약 기간인 3년 동안만 키움 팬을 하겠다고 했었죠. 그런데 그 친구가 계약을 연장해서 저 역시 키움 팬 기간을 연장했어요(웃음).
김태우 클래식 분야는 저와 조금 멀었어요. 조금 사연이 있는데… 처음 클래식 공연 진행자로 섭외 요청을 받고 고사하려고 했어요. 그 분야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고 해서요. 그런데 그냥 전화로 고사하는 것보다는 직접 찾아뵙고 거절 의사를 밝히는 게 예의인 것 같아 찾아갔어요. 그런데 그쪽 입장에서는 제가 직접 온다고 하니까 섭외가 된 줄 아셨던 거예요. 제가 도착하자 이미 회의실에 십여 명이 기대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계시더군요. 그 상황에서 차마 거절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어요(웃음). 그래서 어찌어찌 시작한 일인데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좋아 3회만 하려고 했던 공연 기획이 장기 프로젝트가 됐죠. 나중에는 기왕 하는 거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진행 대본도 직접 쓰면서 열심히 했어요. 취미는 아니었지만 취미보다 더 깊이 하게 된 일이죠. 참, 산책도 좋아해요. 그냥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걷는 거 좋아해요. 그것도 제 쉬는 방법이라면 방법이네요.
유태웅 저는 취미가 무척 많은 편이에요. 승마, 테니스, 스킨스쿠버, 바이크, 수영,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를 무척 좋아하지요.
박호산 복싱도 빼놓으면 안 되지. 금메달까지 땄는데.
유태웅 맞아요. 아마추어 복싱대회에 나갈 정도로 복싱도 좋아했죠. 하지만 요즘은 아이들 때문에 여유가 없어요. 세 아이 중 둘이 야구를 하다 보니 손이 많이 가더라고요. 그래도 어떻게든 저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저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그래서 잠도 하루에 5시간만 자요.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하는 시간이 오롯이 저에게 집중하는 시간이지요.
박호산 저는 방송하기 전까지는 취미를 모르고 살았어요. 정말 소처럼 일만 했죠.
유태웅 맞아요. 대학로에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이 있어요. ‘대학로 연극은 두 부류다. 박호산이 나오는 연극과 나오지 않는 연극’
박호산 한 번에 4개 작품을 동시에 준비하고 들어간 적도 있어요. 오전에 A공연 연습, 오후에 B공연 연습, 저녁에 C작품 공연, 다음 날은 B와 C연습 오후에 D작품 공연 이런 식으로요. 그러다 보니 취미를 즐기지 못했어요. 그랬던 제게 처음으로 시간이 주어진 적이 있어요. <슬기로운 감빵생활>에 캐스팅되었을 때 감독님이 작품에 들어가는 6개월 동안 다른 공연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카이스트 역에만 몰두했죠. 그때 6개월이 제 인생에서 처음 생긴 여유였어요. 남는 시간에 뭘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다가 엉겁결에 가상현실 게임인 ‘포켓몬 고’라는 게임을 했어요. 휴대폰 들고 다니며 열심히 포켓몬을 잡으러 다녔죠.(웃음)
김태우 (이해되지 않는 표정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휴대폰을 대고 잡는다는 말이야?
박호산 휴대폰 안에서만 보이는 세계가 있거든. 아무튼, 그때 처음 취미라고도 할 수 없는 취미를 즐기다가 본격적으로 즐기게 된 취미가 서핑이에요. 양양에서 서핑을 타곤 하는데 무척 좋아해요. 덕분에 양양 홍보대사도 됐고요. 날이 추워지면 볼링도 하고 몇 달 전부터 골프도 시작했어요.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옆구리 살이 쭉쭉 빠졌답니다.
배우 유태웅
개구쟁이 같은 웃음과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을 오가는 천생 배우. 그는 인터뷰 장면을 자신의 유튜브 채널인 ‘액터유’에 담고 있었다. 아버지, 교수, 이사 등 다양한 사회생활을 하면서 몸에 밴 따뜻하고 정중한 태도로 일관하던 그도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받을 땐 아직 꿈이 많은 이십 대 청년의 표정이었다.
유태웅 연기하면서 학교 강의도 줄곧 해왔습니다. 2018년도에는 서울문화예술대학에서 강의했고 2021년도에는 동양대에서 전임교수 자리를 제안받았어요. 마침 일정과 의욕 모두 잘 맞는 시기라 전임교수로 강의를 하게 되었죠. 당시 방송실연자권리협회에서는 이전부터 비상임이사를 맡고 있었고요. 그러다가 작년에 송영웅 이사장님이 협회에 취임하면서 제게 협회 상임이사직을 제안하셨어요. 그런데 대학 전임교수와 상임이사를 겸직할 수 없었죠. 고민하다가 본연의 직업인 배우와 조금 더 가까운 협회 상임이사직을 맡았어요. 전임은 아니지만 지금도 다른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유태웅 우연히 인터넷 신문 기사를 읽었어요. 축구를 좋아하는 아들이 5만 원이 없어 축구학교를 가지 못한다는 내용이었죠. 같은 부모 입장에서 가슴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그 기사를 쓴 송영애 기자에게 연락해 괜찮으시면 제가 아드님을 후원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단칼에 거절하시더라고요. 그런 의도로 쓴 기사가 아니라면서요. 저도 포기하지 않았죠. 다음 날 또 전화를 걸었고 또 거절당했어요. 그렇게 일주일 넘게 부탁과 거절이 반복되다가 마침내 송영애 씨가 마음을 열었어요. 그래서 약 5년간 아이를 후원한 적이 있는데 훗날 그 분이 모 방송에서 ‘유태웅을 찾는다’고 하셨어요. 그 분은 제가 배우 유태웅인줄 전혀 모르셨던 상태였어요. 나중에 연락이 닿아 아이와도 반갑게 재회했습니다. 아이는 축구선수는 아니지만 반듯하게 잘 자라 훌륭한 사회인이 되어 있더군요.
박호산 그 아이가 손흥민이 되었다면 정말 완벽한 시나리오가 되었을 텐데.
(일동 웃음)
유태웅 그렇지 않아도 송영애 씨가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아이가 축구선수는 되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을 선물로 받았다”고요. 값진 경험을 선물 받았으니 그 경험을 다른 누군가에게 꼭 나눠주라고 가르치셨대요.
유태웅 어느 정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취미활동을 하죠. 이런 능력을 키워두면 나중에 배역을 맡을 때 유용하겠다는 생각은 해요. 반대로 승마 같은 경우는 사극 촬영에 필요해 속성으로 배웠는데 배우다 보니 재밌어서 드라마 촬영이 끝난 후에도 꾸준히 배우게 된 경우죠.
배우 김태우
나른하면서 건조한 목소리. 배우 특유의 섬세하고 복잡한 눈빛. 그는 당장이라도 <해변의 여인>의 ‘원창욱’으로 혹은 <굿와이프>의 ‘최상일’로 말을 걸어올 것 같은 표정으로 배우의 고통을, 설거지하며 딸과 이야기 나누는 아버지의 삶을, 동료와 고민을 함께 나누는 친구의 모습을 솔직하고 털털하게 보여주었다.
김태우 격렬히 반대하지는 않으셨어요. 내켜 하지 않는 정도였죠. 부모님은 제가 경영학을 전공하길 바라셨어요. 아버지가 보시기에 제가 배우감은 아니었나 봐요. 아버지의 반대 덕분에 더 열심히 공부했어요. 공부를 못해서 배우가 되려는 게 아니라 공부도 잘하지만 정말 하고 싶어서 배우가 되려고 한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죠.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봉투를 내미시더라고요. 봉투 안에 『연극개론』과 『배우수업』 책 두 권이 들어있더군요. 아버지도 아들이 연기한다고 하니 지인에게 물어보셨나 봐요. 그런데 “지금은 연극영화과가 전국에 예닐곱 개밖에 없지만 앞으로 문화 콘텐츠가 지금보다 훨씬 발전할 거다. 학과도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거고. 그러면 잘 배워두었다가 교수직도 할 수 있다” 이런 요지의 말을 들으셨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제가 교수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연극영화과도 괜찮다고 판단하신 거죠. 아무튼 그렇게 허락을 받고 배우가 됐어요.
김태우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예요. 간단히 말하자면, 일단 저는 대본에 나오지 않는 공간을 고민해요. 가령 중국집에서 친구를 만나는 장면을 촬영한다고 하면 친구를 만나기 전 나는 어떻게 그 중국집에 갔지? 택시를 탔나? 지하철을 탔나? 늦어서 뛰어왔나? 아니면 화장실에 들렀다 갔나? 혹시 너무 일찍 도착해 시간이 남아서 담배를 한 대 피우지는 않았을까? 이런 식으로요. 시청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빈 공간 즉, 인물만의 세계를 많이 연구하는 편이죠.
김태우 저는 배역에서 굉장히 잘 빠져나오는 편이에요. 오히려 들어가기가 괴롭고 힘들죠. 첫 촬영까지가 너무 힘들고 오히려 촬영이 들어가면서부터 편해져요. 딱 한 번 힘든 작품이 있었어요. <돌이킬 수 없는>(2010년, 박수영 감독) 이라는 작품이에요. 일곱 살 난 딸이 실종되었다가 시체로 발견되면서 그 범인을 찾는 영화인데 영화에서 두 씬을 제외하면 내내 힘들고 고통스러운 장면만 있어요. 딸이 시체로 발견되고, 범인을 쫓아다니고 이런 역할을 6개월 내내 하다 보니 정말 우울하고 어두워지더라고요. 당시 제 아이들도 어렸을 때거든요. 그때 힘들었던 경험을 제외하면 배역에서 아주 잘 빠져나오는 편이에요. 말씀드렸다시피 들어가기 전의 두려움이 훨씬 크고 강렬하죠.
배우 박호산
5분 뒤 당장 연극 무대에 올라갈 것 같은 선 굵은 표정과 강렬한 눈빛.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서만 풍기는 뜨거움. 여전히 연기와 깊은 사랑에 빠진 그는 ‘연기’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사랑 고백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반짝였다.
박호산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 영화는 감독의 예술,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는 말이 있죠. 정말 다 달라요. 특히 연극은 무대에서 만져지는 특유의 공기가 있어요. 작은 공간에 관객들이 있고 그 관객 앞에서 연기를 하다 보면 그 시간, 그 공간에만 생기는 공기가 있지요. 그 공기에 관객과 직접 주고받는 교감이 스미고요. 드라마는 아무래도 작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영화는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연극은 지금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가 어떤 분위기, 어떤 공기를 만드느냐에 따라 그날 무대의 공기가 달라져요. 그 공기를 관객에게 날 것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건 연극만의 매력이지요.
유태웅 그렇지 않아도 5월에 박호산 배우와 <오셀로>라는 연극에 더블 캐스팅이 되었어요. 둘 다 오셀로를 맡아 연기하게 되었죠.
김태우 두 번 보기는 좀 그렇고……, 난 누구의 오셀로를 봐야 하나?(웃음)
박호산 앞부분은 태웅이 오셀로를 보고 나와. 그리고 다음 날 내 오셀로에서는 뒷부분만 보면 돼요.
(일동 웃음)박호산 둘 다예요. 카이스트 경우 나에게 있는 부분을 추려 살을 붙였어요. 나와 닮지 않은 모습은 과감히 떼어 버리기도 했죠. 그렇게 따지면 모든 배역에 제 모습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맡은 배역이 친구처럼 느껴져요. 친한 친구를 사귀면 서로 닮아가잖아요. 저도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악역을 맡으면 가까운 지인들이 다 알아요. 평소 제 모습에서 제가 맡은 배역의 분위기가 느껴진대요. 제가 좀 까칠하게 굴고 하면 다들 ‘아, 쟤 또 악역 맡았구나’하고 생각하죠.
박호산 영화 <왕의 남자>로 많이 알려진 작품의 원작이 연극 <이(爾)>예요. 그 연극에서 공길이 역할을 맡았는데, 제게는 너무 생경한 인물이라 그 인물과 가까워지기가 무척 힘들었던 것 같아요.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 제 캐릭터를 다양하게 봐주시는 게 너무 행복해요. 자칫 배우가 한 배역을 잘하면 그쪽으로만 계속 흘러갈 수도 있거든요. ‘문래동 카이스트’를 잘했으니까 계속 코믹으로 간다거나 악역을 잘했으니 계속 비열한 역할만 한다든가 그럴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다행히 다양한 배역을 맡게 되어 무척 감사해요.
유태웅 사실 그렇게 다양한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는 건 박호산 배우가 연극으로 다진 내공이라고 봐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본인은 즐겁게 한다고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고민과 고통이 얼마나 크겠어요.
박호산 스크린이요. 이게 좀 안타까운 부분이에요. 코로나를 지나면서 많은 영화가 개봉 시기를 놓쳐 대기 중이거든요. 약 120편의 영화가 대기 중이라고 들었어요. 그렇게 기다리다가 넷플릭스에서 개봉하기도 하고요. 얼마 전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도 그렇게 개봉된 영화예요. 다행히 엊그제 개봉했는데 넷플릭스에서 세계 2위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맡은 역할이 비중이 크진 않지만 저는 그 영화가 너무 좋아 제 배역에 밀도를 높여 연기했어요. 끝나고 감독이나 배우들과도 유대감이 많이 형성되었고요.
박호산 막내인 제가 먼저 발언할게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밤을 자주 새웠어요. 저뿐 아니라 대부분 배우와 스텝이 밤새워 작품을 찍었지요. 그런데 요즘은 밤샘 촬영이 없어졌어요. 촬영 스텝들도 노동법 보호를 받아 주 52시간을 넘기며 일하지 않게 되었거든요. 당연히 촬영장 분위기도 좋아졌어요. 예전에는 다들 피곤에 찌든 기색이 역력했는데 지금은 밝은 얼굴로 서로 인사를 나눠요. 이 부분은 무척 좋아진 점이라고 생각해요. 방송실연자권리협회에서 재방료를 받게 된 부분 역시 무척 만족해요. 다만, 공중파와 종합편성 재방송료 요율이 어떻게 다른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OTT 역시 복잡하고요.
김태우 막내야, 우리 때는 재방료고 뭐고 없었어! 재방송 방송료를 챙겨주기만 해도 감사할 따름이지!(웃음) 웃자고 한 말이지만 정말 재방송료를 받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아요. 방송실연자권리협회에서 재방송료를 주는 제도는 정말 획기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드라마 대본 여건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김수현 작가나 몇몇 작가를 제외하면 쪽대본이 많았어요. 배우가 배역을 연구할 시간이고 뭐고 대본 하나 받기에 급급했죠. 특히 사극 같은 경우는 준비 시간이 워낙 길다 보니 대본이 안 나와 고생한 적이 많았어요. 작가들 원망도 많이 했죠. 그런데 요즘은 정말 달라졌어요. 방송 환경이 달라지면서 사전제작 작품이 많아졌거든요. 당연히 대본도 완성되어 나오고요.
유태웅 말도 안 되는 상황이긴 한데…, 예전에는 감독이 배우를 구타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배우의 지위가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죠. 지금은 많은 부분이 나아지고 있어요. 배우의 권리나 지위도 좋아지고 있고요. 물론 아직 개선되어야 할 점이 많지만 아까 박호산 배우처럼 왜 요율이 다른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무척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궁금해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바꾸고 싶다는 의지가 있어야 바뀌는 거니까요.
유태웅 맞습니다. 그 부분을 위해 연기자노동조합도 존재하고요. 방송실연자권리협회와 연기자노동조합 두 단체가 방송 실연자의 권리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김태우 두 단체가 어떻게 다른 거예요?
유태웅 방송실연자권리협회는 방송 2차 사용료를 징수해 분배하는 신탁 기관이에요. 연기자노동조합은 배우가 불이익을 당했을 때 직접 협상하는 협상권을 가진 단체고요. 두 단체 모두 방송인에게 중요한 곳이지요. 그런데 노동조합의 조합원 수가 방송실연자권리협회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하지만 두 단체 모두 저희 같은 연기자에게는 무척 중요한 단체입니다.
박호산 저는 조합에 가입해 조합비 잘 내고 있습니다.(웃음)
김태우 저는 막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조합에 가입해 조합비 잘 내고 있습니다.(웃음)
박호산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두 단체를 좀 더 유기적으로 연결해 운영하면 어때요? 노동조합에 가입한 회원만 방송실연자권리협회에 회원 자격을 준다든지, 조합원에게 재방료를 더 준다든지 이런 식으로요.
유태웅 법적으로 두 단체가 전혀 다른 단체이기 때문에 그런 강제성을 적용할 수는 없어요.
김태우 노동조합 가입률이 적은 가장 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유태웅 아직 인식이 부족한 것도 있고 조합비 부분도 있겠죠.
김태우 조합비도 있지만 제 생각엔 조합비를 내고 당장 피부로 와닿는 실질적인 이익이 없는 것도 이유가 아닐까요? 출연료를 못 받았거나 하는 불이익을 당하기 전까지는 조합의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하는 면도 있으니까요.
유태웅 그런 측면도 있죠. 미국은 미국배우방송인노동조합(SAG-AFTRA)이 아주 막강한 힘을 갖고 있어요. 이 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배우로서 활동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죠. 우리도 방송실연자권리협회와 노조가 이 정도 강력한 힘을 가져야 방송인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더 힘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협회와 조합 모두 많이 노력하고 있으니 여러분도 많은 관심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태우 (손사래 치며) 저는 혈액형이나 MBTI를 정말 믿지 않는 편이에요. 그걸로 복잡한 인간의 결을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나요? 아무튼 저는 ESTJ예요.(일동 웃음) 그런데 I의 성향도 꽤 있는 편이에요.
박호산 관심 없다면서 정확히 알고 있네!
김태우 설거지하는데 딸이 옆에 와서 이것저것 묻더라고요. 그래서 대답해줬는데 제가 ESTJ라더군요.
박호산 저는 자주 잊어버려서 아예 적어뒀어요. ENTP예요.
유태웅 저는 ENFJ예요.
박호산 저는 배역에 따라 성격이 달라져요. 예전에 평생을 인정받지 못한 채 죽은 예술가들을 연기한 적이 있어요. 에릭 사티, 김광석, 이중섭, 민효석 이런 인물을 한 1년 계속 연기하다 보니 우울증이 오더라고요. 제가 무슨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성격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유태웅 저는 굉장히 밝은 편이에요. 몸도 건강하게 관리하려고 노력하는 편이고요. 고통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에요. 가족에게는 되도록 듬직하고 편한 가장의 모습만 보여주려고 해요. 고민은 혼자 있는 시간에 하죠. 아침에 운동하는 이유도 어떻게 보면 저만의 시간이 필요해서인 것 같아요.
김태우 저는 사람들을 만나면 의외로 말을 잘하고 밝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실제로는 예민하고 조용한 편이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저에게 재밌다고 말하면 제 아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해요. 집에 있을 때는 말도 많이 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거든요.
유태웅 지구의 종말이거나 불치병이거나 해서 마지막 연기를 한다 해도, 늘 해오던 대로 촬영할 것 같아요. 그 순간 제게 주어진 역할을 그냥 평소대로 할 것 같아요. 마지막이라고 해서 그 역할에 필요하지 않은 감정을 집어넣을 수는 없으니까요.
박호산 연극 <벚꽃 동산>에서 피르스 역을 해보고 싶어요. 벚꽃 동산에서 로파힌 역은 해 본 적이 있는데 피르스 역은 안 해봤어요. 지구의 마지막 날, 어쩐지 피르스는 그곳에 누웠을 것 같네요.
김태우 특별히 하고 싶은 역할은 없어요. 그저 좋은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저예산 영화나 독립영화에도 자주 출연했어요. 비중을 떠나 배우로서 좋은 작품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라고 생각해요. 좋은 작품에서 어떤 배역이든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고 싶어요.
문래동 작은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이 다 녹도록 나눈 이야기는 뜨겁고 진지하고 유쾌했다. 배우들을 통과할 인물들이, 그 인물들이 들려줄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여전히 다른 인물, 다른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을 유태웅, 김태우, 박호산 배우가 오래도록 연기와 사랑에 빠져 있기를, 그 사랑이 내내 뜨겁고 눈부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