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의 서재는 탤런트, 성우, 코미디언 등 방송실연자의 다양한 감정과 영감, 창의력에 도움이 되는 양서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소설, 산문, 시, 인문학서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이 방송인 여러분에게 반짝이는 뮤즈가 되어 주길 기대합니다.
흔히들 영국인은 외국인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거기서 즐거움을 느낀다고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국인은 외국인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들은 스스로 혼란스럽기 위해 그런 일들을 벌인다. 도대체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영국인이 내게 그 이유를 말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국인들과 이 문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눌 상황도 못 된다. 영국인들은 으레 자신들이 그렇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이 영국 사람에게 영국의 체계 중 이상하거나 불합리한 점을 이야기를 하면 가령, 무게나 단위 등의 이야기를 꺼내면 영국인들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요.”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조목조목 따질 것이다.
“하지만 부셀(곡물 양 단위로 약 36리터-옮긴이)이나 퍼킨(약 41리터-옮긴이), 킬더킨(16~18갤런-옮긴이)처럼 무의미한 단위들이 너무 많잖아요. 말이 안 되지 않나요?”
그러면 영국인들은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말이 되지요. 반 퍼킨은 한 주전자고, 반 주전자는 한 모금이고, 반 모금은 닭 모이만큼인데 도대체 여기서 논리적이지 않은 구석이 어디 있단 말이요?
- 본문 중
까칠한 할아버지의 유쾌한 여행담
빌 브라이슨의 여행책은 어느 것을 골라도 실패하지 않는다. 그의 책을 읽으려면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읽어야 한다.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 때문에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여러 책 중에 <발칙한 영국산책2>를 고른 이유는 직접 번역하면서 가장 꼼꼼히 읽은 책이기도 하고 그의 예민한 통찰력이 유독 빛나는 책이기도 해서다.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국산책2>는 이제 막 할아버지가 되기 직전에 그가 시작한 여행이다. 그는 여행을 마칠 무렵 손녀의 출생 소식을 듣게 된다.
영국 곳곳의 유적지와 아름다운 풍광을 소개하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지 않다. 내내 투덜대고 까칠하게 불평과 불만을 쏟아낸다.
하지만 이런 까칠한 투덜거림은 절대 거슬리지 않는다. 오히려 통쾌함이나 유쾌함에 가깝다. 대체로 그의 투덜은 무해하고 건강한 비판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투덜대기 위해 그가 깊고 섬세하게 관찰한 영국의 문화와 풍경이 매혹적이다. 그는 투덜거리기 위해 쉴 새 없이 관찰하고 골똘히 생각한다. 벽돌 하나, 기운 난간 하나, 심드렁한 영국인의 한 마디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생각하다가 그만의 빛나는 사유로 들려준다. 작은 돌멩이 하나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으며 이름 모를 나무며 그냥 지나쳐도 좋을 작은 술집조차 꼼꼼히 확인해 정확한 이름과 그에 얽힌 역사, 사건을 특유의 화법으로 술술 풀어낸다. 까칠하지만 유쾌한 여행자의 방대한 지식과 깊은 통찰력이 재치있게 버무려진 여행책과 함께 영국의 이름 모를 시골 마을을 깔깔대며 산책하길 바란다.
빌 브라이슨 지음 | 박여진 역 | 예문사 | 2016년
간섭은 남의 일에 끼어들어 영향력을 미치려는 행위다.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상대를 억누르거나 좌지우지하려는 행동이다. 여기에는 상대가 미숙하거나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상대가 늘 걱정스럽거나 위태롭거나 애처롭다고 느낀다. 충고나 지적, 훈계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중략)
간섭은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을 뜻하고, 참견은 별다른 영향력 없이 공연히 상대의 일에 끼어드는 것을 뜻한다. 전자는 제 주장을 관철하려는 의지가 강한 반면, 후자는 그런 의지가 약하다. 그래서 참견을 물리치는 것보다 간섭을 물리치는 것이 더 어렵고 부담스럽다.
- 본문 중에서
타자에 대한 부당하거나 공연한 개입
간섭과 참견
언어에는 결이 있다. 비슷해 보여도 파랗다와 푸르다와 푸르스름하다와 푸르딩딩하다의 결은 모두 다르다. 언어의 결을 섬세하게 구분해 사용하는 사람은 어딘지 달라 보인다. 그의 내면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을 언어의 숲이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들여다보는데 사전만큼 좋은 책도 없다. 글을 쓰는 사람이 사전을 늘 곁에 두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대사로 감정과 상황을 전달하는 배우나 성우에게도 사전은 언어의 숲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제대로 모르고 하는 말에는 말의 힘이 모호하고 흐리다. 전달 과정에서 불필요한 군더더기와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알고 전달하면 말에 힘이 실린다. 그 힘은 듣는 이의 마음에 말이 더 정확하고 깊이 안착하게 해준다.
이 책은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언어의 결을 알려준다. ‘감사하다와 고맙다’, ‘거만과 오만과 교만’, ‘감정과 정서와 감성’ 등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결이 다른 언어들을 세심하고 정확하게 짚어준다. 이미 알고 있는 표현도 많겠지만 의외로 구분 없이 사용했던 말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랄 수도 있다. 이런 소소한 놀라움은 독서만이 주는 즐거움일 것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말했던 당신에게, ‘사실’을 ‘진실’이라고 착각했던 당신에게 이 책은 명료하고 풍성한 언어의 숲을 선사할 것이다.
안상순 지음 | 유유출판사 | 2021년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니 부디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삶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마지막 축복을 누릴 때까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좋은 일이다. 오래 사는 것이 전체적으로 내게 좋은 것인 한 죽음은 나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에게 죽음은 너무나 일찍 찾아온다. 그렇다고 영생을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영생은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죽음을 바라보면서 이를 거대한 미스터리, 너무 두려운 나머지 감히 마주할 수 없는 압도적이고 위협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결코 합리적인 태도라고 볼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나는 ‘부적절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너무 빨리 죽는다는 사실에 슬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기회를 부여받은 게 얼마나 놀라운 행운이지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인생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죽음으로 삶을 묻는 철학서
예일대 명강의로 꼽히는 셸리 케이건 교수의 강의를 책으로 엮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제목부터 묵직하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죽음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동시에 삶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죽음을 이해하려면 필연적으로 삶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죽음을 추상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이나 슬픔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죽음의 본질을 철저하게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죽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 죽음의 실체를 철학 담론으로 풀어낸다.
형이상학과 가치론 등 다소 어려운 철학적 접근법으로 서술되는 만큼 쉬운 책은 아니지만 죽음이라는 화두 자체가 쉬운 주제가 아니므로, 꼼꼼히 다져 읽다 보면 저자의 논리를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또한, 강의식으로 구성된 책이다 보니 질문과 답, 답에 대한 논증, 그 논증에 대한 반박, 반박의 반박과 풍성한 예시들이 이어진다. 다소 느리게 읽히더라도 끝까지 읽다 보면 삶의 작은 언덕 하나를 넘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죽음을 멀고 추상적인 영역에 두고 막연하게만 접근했던 이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죽음을 실체적이고 철학적으로 접근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 책을 읽기 전과 후에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죽음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접하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접근하다 보면 막연하고 두려웠던 그 화두를 통해 ‘삶’을 더욱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셀리 케이건 지음 | 박세연 역 | 웅진씽크빅 | 2013년
글. 박여진
insta @didibydidi email didibydidi@gmail.com ——— 읽고 또 읽고 걷고 또 걷는다. 번역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책을 읽고 무수한 길을 걷는다. 책에서 만난 새로운 길을 이야기하고, 길에서 만난 새로운 사색을 글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