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한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기획운영팀장
KoBPRA WEBZINE WRITE.S vol.84
어느 입회 신청
팬데믹으로 인하여 협회에서 온라인 입회시스템을 도입한지도 어언 2년이 되어간다. 이제는 온라인으로 손쉽게 입회신청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협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직접 협회 사무실에 방문해야만 했다.
어느 늦은 오후, 땀과 흙먼지에 절어 덥수룩한 차림으로 입회를 하겠다며 찾아온 청년이 있었다. 그를 응대하려고 보니 신고 온 작업화에서 흙이 떨어져 복도가 엉망이었다. 서류 작성을 안내하고는 펜을 쥐어주는데 물집인지 굳은살인지, 하여간 손바닥이 인상적이었다. 가입요건을 확인하고자 출연작을 물었더니 대뜸 그가 이렇게 되묻는 것이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을 찍었는데, 이게 재방료가 나오나요?”
지금으로서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에 대해 재방료가 없다고 답했다. 갸웃거리는 그에게 OTT플랫폼을 대상으로 저작인접권 사용료를 징수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설명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출연한 작품이 TV에서 나오면 재방료를 주는데, OTT에서 나오면 재방료를 안준다는거죠?”
특약이 없는 한 그렇다고, 특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는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외에는 아직 출연한 작품이 없다고 했다. 규정상 일시불로 입회비 30만원을 납부해야 하므로 입회를 할지 말지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앞으로 활발히 활동할 계획이라면 번거롭게 다음에 다시 방문하느니 오늘 방문한 김에 먼저 가입해두는 편이 좋겠다’고 조언하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 청년은 결국 회원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 그 회원의 이름을 잊어버리게 되었지만, 업무를 하다 보면 간혹 그의 실루엣이 떠오르고는 한다. 그는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저작인접권 사용료를 받게 되었을까?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찾아온 그를 머뭇거리게 만든 협회의 특약이란, 실은 생계의 문제나 막연해 보이는 꿈이 아니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동안의 경과
2년이나 지난 일을 새삼스레 적어보는 것은 최근에 방송이 아닌 영상 분야에서 협회가 저작인접권 사용료를 징수할 단초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협회는 정관에 기재된 ‘방송실연자’라는 용어를 ‘영상실연자’로 개정하고자 정관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정관을 개정하고 이를 근거로 저작권 신탁관리업 허가증을 새로 받는다면 협회의 신탁관리범위가 방송에서 영상으로 확대될 것이다. OTT 오리지널 콘텐츠에 대해서도 사용료를 징수할 자격을 갖추는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저작권법의 영상저작물 특례는 여전히 ‘특약이 없으면’ 실연자의 권리를 영상제작자에게 양도추정하고 있다. 작년 12월 협회는 임오경 의원과 ‘저작권법 영상저작물 특례 개정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하였고, 올해 6월 저작권법 일부개정법률안(임오경의원 등 10인)이 발의되었다. 우리 모두는 법개정을 간절히 염원하고 있으나, 입법은 국회의 몫이다.
그와 별개로 협회는 자체적인 돌파구를 찾고 있다. 저작권법이 시청각실연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협회는 스스로 협상력을 발휘하여 영상저작물 특례의 양도추정을 뒤집는 특약을 체결해왔다. 지금껏 방송사와 특약을 체결하여 저작인접권 사용료를 징수한 것처럼, OTT 플랫폼을 대상으로도 특약을 체결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저작권법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러한 노력으로 작년 8월 ‘OTT Original 실연자 권리보호 협의체’가 꾸려졌다. 협회는 협의체를 통해 국내 OTT플랫폼 사업자와 정기적인 만남을 가져왔다. 협의체에서는 OTT 오리지널 콘텐츠를 정의하는 작업을 시작으로 치열한 토의가 있었으나, 국내 OTT플랫폼의 누적된 적자가 심각한 등의 사정으로 특약을 체결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다. 정작 수익을 거두는 넷플릭스는 협의체의 구성원이 아니었을뿐더러, 별도의 협상을 요청해도 묵묵부답이다.
헐리우드 배우의 파업
미국의 배우들은 7월부터 파업을 벌이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배우들이 인공지능 기술에 반대하여 시위를 하고 있다며 이번 파업을 근시안적인 21세기형 러다이트 운동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헐리우드 배우파업의 핵심이 되는 쟁점은 정당한 보상 문제다. 요컨대 ①종전에 방송사가 지급하던 재방료에 비해 OTT플랫폼이 지급하는 재방료가 심각히 적으니 더 달라는 것이고, ②인공지능 기술을 사용하여 배우를 재현한다면 최소한 사전에 허락을 구하고 보상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국도 배우에게 재방료를 지급하는 데 법적 근거는 미약하다. 그들 역시도 조합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스스로 권리를 쟁취해왔다. 그 성과가 상당한 수준이라, 미국배우조합(SAG-AFTRA)과 단체협약을 체결하지 않고서는 배우가 등장하는 상업용 영상물을 만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넷플릭스도 이미 단체협약을 체결하여 사용료를 납부하고 있던 터였다. 뿐만 아니라 조합은 사업자로부터 재원을 조달하여 건강보험, 연금 등의 복지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한 성과는 조합원 개개인의 참여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번 파업에서도 그 모습이 잘 드러난다. 맷 데이먼은 언론 인터뷰에서 공개적으로 파업지지 메시지를 전했고, 톰 크루즈는 심지어 협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헐리우드 배우가 길거리 피켓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문제를 대하는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스스로 일구어낸 성취
창립 이래 20년간 협회는 사업자에게 직접 찾아가 특약을 요구하였고, 꾸준히 국회의 문을 두드리며 목소리를 냈다. 어느덧 70개가 넘는 채널과 특약을 체결하고 연간 400억원이 넘는 사용료를 징수한 데 이르기까지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루었다.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넷플릭스의 태도를 생각하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다시 흙먼지를 뒤집어쓴 입회자를 떠올린다. 막연한 꿈과 생계의 문제 앞에 갈등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 삶의 단면이자, 경력을 시작하는 실연자의 전형일 것이다. 실연자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식탁에 밥을 차리고 각종 공과금을 납부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협회의 특약은 그러한 생활을 지탱하는 중요한 원천이다.
우리는 입법의 불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자체의 협상력을 바탕으로 성과를 이루어 왔다. 그 협상력이란 개개인이 스스로에 대한 의무와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다함으로써 발휘된다. 현장의 불합리한 상황을 사무처에 제보하거나, 협회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개인의 힘은 미약하더라도 그 수를 합하면 자그마치 1만5000명에 이른다. 회원 개개인의 참여는 결국 ‘실연자 공동체의 삶을 지탱하는 특약’의 밑바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