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여름의 기세에 아직 가을이 들어오지 못해 머뭇대던 9월 어느 날,
부산의 조용한 스튜디오에서 배우 김영옥을 기다렸다.
오랜 세월을 지나오느라 너무 많은 일을 겪어야 했던 사람.
그래서,
욕을 노래처럼 하는 사람,
노래를 말처럼 읊조리는 사람,
한 마디의 대사를 한평생의 삶처럼 내뱉는 사람.
그가 스튜디오에 들어왔다.
배우 김영옥이 입을 열자 크고 적막했던 스튜디오 거실이
그의 맑고 힘 있는 목소리로 꽉 찼다.
“노여움도 거절도 없이 그냥 했어. 그 일이 너무 좋았으니까.”
그렇게 바쁘지도 않아. 매일 똑같지. 지금은 드라마 촬영하느라 부산에 내려와 있어. 어제까지 꼬박 24시간을 촬영하고 와서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네. 양해해 줘요. 작년에 드라마 마치고, 얼마 전 영화 <소풍>도 마쳤어. <소풍>은 10월에 ‘부산 국제 영화제’에 초청되어 먼저 개봉되고, 정식 개봉은 내년 초 정도 할 거야. 지금 촬영 중인 작품은 미니시리즈로 내년에 방영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
바쁜 것도 없다며 겸손히 말하는 그의 일정은 놀라울 정도로 빡빡했다.
인터뷰 전후로 새벽까지 이어지는 촬영이 있었고
촬영 후에는 곧바로 제주도에서 강연 일정까지 잡혀 있었다.
대단한 건 없고, 매일 아침 공복에 사과를 한 알씩 먹어. 그리고 조금 있다가 삶은 달걀 한 알을 먹고. 이 두 가지는 중요하게 지키는 루틴이야. 특히 사과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먹어. 가끔 촬영 일정이 길어져 사과를 먹지 못하면 마음이 불편해. 그 외에는 뭐 별다른 것 없어. 되도록 소식하려고 하는 편이고, 소식하면서 편식은 하지 않으려고 하지. 호박이나 감자, 고구마 같은 것도 잘 먹고, 고기나 채소도 잘 먹는 편이지. 다만 너무 치우쳐 먹지 않으려고 하는 게 관리라면 관리지.
연기에만 발휘되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어.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피곤해도 연기를 시작하면 순간 몰입이 돼. 추울 때나 더울 때도 연기만 시작하면 다 잊고 오직 그 연기에만 푹 빠지게 되더라고. 그 순간 응축되어 있던 에너지가 나오는 느낌이 들어. 그리고 그 순한 벅찬 희열을 느껴.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순간이지. 연기를 향한 어떤 사랑 같은 것이 에너지의 원천이 아닐까 싶어.
다들 그렇게 잘못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아. 처음부터 연기로 시작했어. HLKZ (대한민국 최초의 상업방송국 ‘대한방송’)에서 생방송 시절부터 연기를 시작했거든. 출연료랄 것도 없이 거의 무보수에 가까운 돈을 받으며 연기했는데 그래도 참 좋았어.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당시 프로그램 하나 하면 아시아 빵집이라는 빵집에서 빵 두 개 정도 사 먹을 돈을 받았어. 100원 남짓한 돈을. 그래도 처음 생긴 방송국에서 비중 있는 역할도 많이 하고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방송국에 불이 난 거야. 아마 많이들 알고 계실 사건이지.
이후 춘천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입사했어. 아나운서는 그때 된 거야. 당시 꽤 많은 지원자가 있었고 여자 아나운서는 딱 한 명 뽑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아나운서로 뽑혀서 아나운서로 몇 년 일했어. 당시 아나운서 월급이 2,000원 정도였는데 집세가 300원이었어. 차비에 식비까지 하면 너무 빠듯했지. 아나운서다 보니 의상도 여러 벌 있어야 하고 화장이며 머리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거든. 차비도 아껴야 해서 먼 길을 걸어 다니던 서글픈 날도 허다해.
그렇게 살다 보니 문득 학창 시절 연극에 푹 빠져 지냈던 때가 떠오르더라고.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 때까지 내내 연극을 했거든. 그래서 과감히 아나운서를 그만뒀어. 그때 부모님이 걱정 많이 하셨지. 번듯한 직장을 그만둔다니 정말 막막하셨을 거야. 아나운서를 그만두고 석 달을 쉬었는데, 그 석 달이 66년 연기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유일한 휴가네. 하지만 지금도 후회는 전혀 없어. 그때 그만두고 다시 연기 활동을 시작한 것은, 지금 돌이켜도 정말 잘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해.
그랬지. 그저 배역이 주어지면 주어지는 대로 했어. 노여움도 거절도 없이, 그냥 했어. 그 일이 너무 좋았으니까. 물론 분량에 대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래도 주어진 역에 최선을 다했어. 좋아하는 일이니까.
이금림 작가의 <옛날의 금잔디>. 거기서 두 가지 성향을 연기했거든. 처음에는 온화하고 얌전한 어머니였다가 나중에 치매 걸린 노인이 되는 역이었어. 처음에 그 배역을 받았을 때는 나에게 왜 이렇게 온화한 어머니 역을 주셨나 했는데, 나중에 치매 걸린 노인 역을 하면서 내게 너무 잘 맞는 역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 작품 할 때 참 행복했어. 박정란 작가의 <내일 잊으리>도 좋아했고, 노희경 작가 작품들도 좋아했어.
<올드미스 다이어리>도 못 잊을 작품이지. 거기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완전히 나 자체였거든. 유쾌하게 사람들과 정을 나누고 여기저기 참견하는 역할이 참 재미있었어. 직설적이고 뼈 있는 말도 잘하는 할머니 역이었지. 드라마 외에도 <뜨거운 싱어즈>도 재미있었어. 내가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유튜브 조회수가 그렇게 많다는 얘길 듣고 깜짝 놀랐어. 기분이 좋더라고. 배우는 팬들의 사랑이 양식이잖아. 사랑을 밥처럼 먹는 존재들이지.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이 정도지만 많은 작품을 좋아했고, 많은 배역을 사랑했어.
“나의 행복은 아주 소박해.
좋은 커피집에서 보내는 좋은 시간, 꽃이나 바다를 보게 되는 순간들,
정다운 이와 정다운 말을 주고받는 순간들이 나는 참 행복해.”
많이 달라졌지. 장비들도 좋아지고, 장비가 좋아지니 아무래도 배우들도 조금 더 편하지. 예전에는 밤샘 촬영이 허다했는데 요즘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런 경우도 거의 없고, 배우나 스태프들의 작업 환경도 많이 좋아진 편이야. 또, 방송실연자권리협회 같은 곳에서 재방송료를 챙겨서 주는 것도 많이 좋아진 부분이라고 생각해. 요즘 연기를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권리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런 권리를 못 누리다 이제 누리게 된 나로서는 무척 반갑고 좋은 제도인 것 같아. 용돈 받는 기분이 들더라고.(웃음) 채널도 많아지고 넷플릭스 같은 OTT 플랫폼도 많아졌고.
나는 OTT를 처음 접해본 세대라 구체적으로 말할 부분이 많지는 않아. 아쉬움은 있지만,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 그것보다는 특정 배우에게 너무 많은 보상이 할당되는 게 오히려 조금 아쉬워. 다른 배우들도 조금 더 골고루 보상을 받았으면 좋겠어.
뼈아픈 말이 될지도 모르지만,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게 있어. 사는 게 그렇더라고. 만약 후배 중에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가 너무 더디게 온다면, 연기 말고 다른 일을 보조로 병행하면서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어. 생활이 무너지면 연기도 무너지거든. 생활을 건강하게 꾸리면서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더러는 아무리 노력해도 재능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렇다면 소중한 재능이 빛을 발할 다른 분야를 찾아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런 선택도 용기야. 어쩌다 요행으로 잠깐 빛날 수도 있지. 그런데 대체로 그런 요행으로 나는 빛은 오래 가지 않더라고. 부디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지탱하며 이 일을 할 것. 그리고 재능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 사실을 인정하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아까도 말했지만, 비중이 적은 역할을 하는 배우들도 (보상을) 조금 더 골고루 누렸으면 좋겠어. 너무 기울어진 시장에서 일하다 보면 힘들고 지칠 거라고 생각해. 그런 후배들을 보면 내 마음도 안 좋고. 좋은 건 더 많은 이들이 더 골고루 누렸으면 해. 그러려면 선배들도 길을 잘 닦아야지. 나 역시 지금까지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더 많이 노력해야 하고.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아직 현장에서 활동하는 것이 후배들에게 힘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래서 절대 교만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건강 관리도 더 잘해서 더 좋은 작품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야 후배들이 걸어올 길이 잘 다져질 테니까.
노래 듣는 걸 좋아해. 나훈아 노래도 좋아하고, 그 누구더라… ‘당신과 나 사이에~~~’
김영옥 배우가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가늘고 맑은 음색으로, 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단단한 질감으로 부르는 그의 노래에
인터뷰 장소에 있던 모든 이들의 마음이 일렁였다.
아! 맞다! 문주란. 그이 노래도 좋아하고. 특히 패티김과 조영남을 참 좋아해. 너무 좋아해서 TV에 그이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면 하던 일 다 팽개치고 TV 앞에 앉아 넋 놓고 들어. ‘너무나 사랑했기에~ 너무나 사랑했기에…’ 백지영도 좋아하고, 린이 부른 ‘섬마을 선생님’도 좋고, 장윤정의 ‘초혼’도 좋더라고. 예전에는 책 읽는 것도 좋아했어. 한때는 햇빛 가득 들어오는 거실에서 종일 책 읽는 게 로망이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 그렇게 하려고 보니 눈도 침침하고 목도 뻣뻣해서 힘들더라고. 그러니 후배 배우들은 젊어서 눈 좋고 건강할 때 책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 그래도 타인의 삶을 대본과 연기를 통해 겪으면서 책 못지않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며 위로하지.
나의 행복은 아주 소박해. 좋은 커피집에서 보내는 좋은 시간, 꽃이나 바다를 보게 되는 순간들, 정다운 이와 정다운 말을 주고받는 순간들이 참 행복해.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은 세대라 그런지 몰라도 별것 아닌 순간들이 참 소중하고 감사하더라고. 가끔 어린 친구들에게도 이런 말을 해. 돈이 아주 많아서 모든 걸 누릴 수 있다면 전혀 행복하지 못할 거라고. 모든 걸 다 누릴 수 있다면 오히려 마음의 병이 생길 거라고 말하지. 누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살다가 순간순간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들이 정말 행복한 순간들이야.
물론 내게도 형언 못 할 아픔과 고통의 시간도 있었지. 하지만 작은 행복들은 그 시간들을 비집고 문득문득 찾아오더라고.
때때로 늘. 연기자여서 행복해.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 일에서 희열을 느끼고, 희열에서 행복을 느끼는 일을 한다는 건 정말이지 내 삶의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 지금도 연기를 하면서 가슴이 환하게 차오를 때가 있어. 가슴이 떨리고 행복에 겨운 순간들이. 내가 연기를 할 수 있어서 행복해.
“영옥이 언니는 그 많은 배역을 하면서도 한 번도 같은 연기를 한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매번 다른 연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영옥이 언니가 나오는 드라마가 있으면 꼭 챙겨봐요. 이번에는 어떤 연기를 보여주려나 기대하면서요.”
몇 년 전 <스타다큐 마이웨이> 김영옥 편에서 배우 김혜자가 했던 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인터뷰하며 만난 배우 김영옥은 분명 익숙한 말투,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모습이 하나의 상으로 맺혀지지 않았다.
인터뷰 내내 무수한 그의 목소리와 표정이 지나갔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욕을 찰지게 내뱉는 할머니부터, 서글프고 고단한 어머니, 세상의 지혜를 너무 많이 알아버려 덤덤해진 노인, 맑았던 정신이 빠져나가 허망해진 사람.
인터뷰 다음 날 촬영장에서 만난 김영옥 배우는
분홍 꽃무늬가 가득 들어간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먼발치에서도 푸른 바다 앞에서 꽃무늬 블라우스를 하늘거리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설렜다.
오늘, 가장 빛나는 그의 모습에서
수많은 다른 인생들을 만나게 되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