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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인 코브프라

배우
길해연

어느 노래 가사처럼 ‘그녀는 예뻤다.’

눈빛, 몸짓 그리고 목소리 모두 그랬다.

무게감 있고 묵직한 질문에

경쾌하고 밝은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의 시간은 지금은 걸어가고 있었다.

40년을 지켜낸 무대, 이해랑 연극상으로 증명한 배우로서의 삶.

든든한 나무를 세운 것은 보이지 않는 뿌리였음을.

그녀의 연기는 작품 속에서 배우의 ‘본질’을 흔들림 없이 지켜오고 있었다.

나이가 무색하게, 제2의, 제3의 전성기가 기대되는

배우 길해연을 만났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그녀는 예뻤다.’

눈빛, 몸짓 그리고 목소리 모두 그랬다.

무게감 있고 묵직한 질문에

경쾌하고 밝은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의 시간은 지금은 걸어가고 있었다.

40년을 지켜낸 무대, 이해랑 연극상으로 증명한 배우로서의 삶.

든든한 나무를 세운 것은 보이지 않는 뿌리였음을.

그녀의 연기는 작품 속에서 배우의 ‘본질’을 흔들림 없이 지켜오고 있었다.

나이가 무색하게, 제2의, 제3의 전성기가 기대되는

배우 길해연을 만났다.


KoBPRA WEBZINE Vol.92   글. 박세나   사진. 김성헌
사막에 뿌려진
한 초롱의 물
1986년에 대학 연합 극단 ‘작은신화’을 창단하셨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열 군데 정도 대학교의 극회 출신 친구들이 모여서 ‘작은 신화’라는 극단을 창단했어요. 그때 저희의 심정은 마치 사막에 한 초롱의 물을 뿌리는 심정이었어요. 정말 이십 대다운 무모한 발상이었죠. (웃음) 연극이 하고 싶어 처음에는 대형 극단부터 나름 시장조사도 열심히 했는데 그냥 우리끼리 만들어보자고 의견이 모였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고 상도 여러 차례 받아서 자연스럽게 국문학과에 진학했어요. 주변에서도 재는 글 쓰는 사람이 될 거라고 했고요. 극단에서도 희곡을 써보고 싶었어요.
희곡을 쓰려고 했는데 배우가 되신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극단 초기에는 인원이 적으니까, 역할을 정확하게 나누지 않았어요. 누군가는 포스터도 붙여야 하고, 기획도 하고, 연출도 해야 하고. 그런데 친구들이 “배우도 한 번 해봐”라는 권유에 시작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잘 안 맞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친구 한 명이 주말의 명화를 같이 보면서 영화를 볼 때 그냥 보지 말고 여배우의 연기를 보라고 하면서 한 발 한 발 딛게 해줬어요. 그 친구가 잊히지 않아요.
20대 시절의 작은 날갯짓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처음 극단을 만들 때는 10년만 해보자고 했어요. 그런데 10년이 지났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서 “그럼 10년만 더 할까?” 했죠. 그 다음엔 서로 물어보지 않은 것 같아요. 사실 당시에 초대 대표였던 이유철이라는 친구를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던 아픈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가 연습하던 극을 우리가 추모 공연으로 올리기 위해 다시 모였죠. 당시 대학 등록금이 50만 원이었는데, 각자 5만 원씩 모아서 준비했어요. 그때는 다들 어렸으니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며 많이 싸우기도 했죠. 그런데 연습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거 그냥 쭉 가는 거구나.’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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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라는 세상에서 성장한 ‘사람’
배우 길해연
친구의 권유였지만 배우가 적성에 잘 맞으셨던 거네요. 원래 외향적인 성격이었나요?
정반대에요. 연기하는 친구끼리 그런 말을 종종 주고받아요. 배우 중에 외향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만 명에 한 명은 되겠느냐고요. (웃음) 그런데 다들 웃긴 게 쫑파티 하면 ‘나 이런 자리 너무 어색해, 힘들어’하면서 정말 끝내주게 놀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연기를 잘 몰랐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시작할 수 있던 것 같아요. 저의 내면에서 외치고 싶은 열망을 무대에서 펼칠 수 있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저는 극단 활동을 하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성장한 것 같아요. 글을 쓸 때는 아무래도 혼자만의 세상에 침잠되어 나의 열쇠 구멍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봤다면 연극은 섞여서 함께 해야 하잖아요. 매번 저와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작업도 해야 하니까, 억지로 좋아하는 게 아닌 진심으로 상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했죠. 또 대본 속 인물을 만나고 그 역할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가고 일은 저에게 정말 놀랄 만한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무대에서 매체로 넘어오는 시간이 짧지 않았습니다. 긴 시간 속에 무대와 매체를 이어오면서 힘든 순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선택해서 시작한 일은 후회를 잘 안 하는 편이라 많은 고비를 지나면서도 극단을 이어가는 일이 흔들린 적은 없었는데 두 번 정도 큰 위기가 있긴 했어요.

처음에는 아들이 아팠을 때였어요. 꽤 긴 시간이었죠. 그때는 아이 때문이라면 연기를 그만둘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내가 연기를 내려놓으면 서로 불행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아들도 그냥 제가 연기를 계속하는 게 좋다고 얘기해 줘서 이어갈 수 있었어요.

또 한 번은 연극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 들었을 때였는데, 사실 좋아서 하는 거지만 연극을 계속한다는 게 정말 힘들어요. 그런데 힘든 것 때문에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어느 날 이런 질문이 들었어요. ‘연극이 도대체 이 세상에 뭘 해주는 걸까’하고요. 이거 우리끼리 좋자고 하는 건가, 자기만족인 건가 하는 생각들이요. 조금 맥이 풀리더라고요.
그런데 그즈음 교육연극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워크숍을 하면서 어린이, 청소년 보육원 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너무 감동적인 순간들을 많이 경험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그래, 연극은 정말 마법 같아’라는 확신에 더 신이 났죠. 질문의 해답을 연극 무대의 언저리에서 만나게 된 거죠.

그때 이후로 항상 창작자만의 것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요. 잘못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자유롭지도 새롭지도 못하겠더라고요. 그걸 안 놓치려고 늘 재밌고 신나게 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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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연극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리는 ‘이해랑 연극상’을 수상하셨어요.
이해랑 연극상은 공로상 같은 성격이 있어요. 특정 작품보다는 그동안의 연기 활동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이해랑 선생님의 연기론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 연극계에 어떤 공로를 쌓았는지를 까다롭게 심사하거든요. 당시 여자 배우의 수상이 꽤 오랫동안 공백이었던 상황에서 대학로 출신인 제가 받게 되어 화제가 되었어요. 저는 상업연극은 거의 하지 않고 줄곧 창작극에만 매진해 왔어요. 사실 창작극은 꽤 위험한 작업이에요. 검증되지 않은 작품이고 끝없는 수정 작업을 거쳐야 하니까요. 그래도 우리나라 창작 연극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누군가는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그런 부분을 인정해 주신 게 아닐까 합니다.
매체 연기를 시작했을 때 이런 연기 업적이 기대감으로 다가온 적도 있으셨겠어요.
그런 적은 거의 없었는데 창작극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어 주었어요. 보통 연극 무대에서 매체로 옮겨오면 초반에 적응하느라 고생을 많이 한다고들 하는데, 저는 연극에서 워낙 즉흥극을 많이 했던 터라 현장에서 대본이 바뀌거나 촬영 순서가 뒤집혀도 크게 어렵지 않았어요. 게다가 정말 운이 좋게도 안판석 감독님과 드라마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많은 경우 자신의 틀에 배우를 맞추길 원하는 감독님도 많으신데, 안 감독님은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라고 해주셨어요. 그 점이 너무 좋았어요.
안판석 사단이라고 불릴 만큼 감독님과는 <아내의 자격>을 시작으로 많은 작품을 하셨어요.
안판석 감독님은 보이지 않는 엑스레이를 가진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내가 어떤 허튼 생각을 하거나 적합하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감독님이 직접 지적하지는 않지만, 반대로 배우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하게 돼요. 그러니까 저도 배역에 대해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촬영할 때는 자유롭게 했어요. 그 덕분인지 이후에 다른 감독님과 작업을 하게 될 때도, 뭐랄까 원하는 포인트를 빨리 찾고 익숙해졌어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빨리 이해하면 충돌이 덜 생기고 크게 힘든 부분이 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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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그리고 책
AI시대를 살아가는 배우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은 어떤 게 있을까요.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만들어주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배우한테는 정말 중요한 덕목이에요. 지금 동양대 전임교수로 매주 학생들을 만나는데 이 부분을 자주 언급해요. “연기자로서 가려면 상상하고 세상을 들여다봐. 세상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런 주변 사람들이 대본 속에 들어 있는 거잖아. 그런데 인간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서 무슨 연기를 하겠다 그래. 끝없이 사람을 지켜보고 그 사람을 이해해야지만 네가 연기하려고 하는 대본 속, 그 죽어 있던 인물을 네가 살려낼 수가 있어.”라고요.

그다음은 공감과 이해예요. 저는 연기를 가리키면서 많이 배웠어요. 제가 선생님이니까 늘 학생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죠. 이 친구가 지금 이게 이해가 안 되는구나, 지금 뭔가 긴장하고 있구나하고요. 그러다 보니까 상대에게 집중하는 데 오랜 시간을 썼거든요.

배우로서 촬영 현장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소통이 안 될 때 서로 상처를 받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만약에 지금 감독님이 요구하는 걸 잘못 알아들은 채, 나는 열심히 반복했는데도 자꾸 같은 요구를 하면 '왜 날 미워하지?' 이렇게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러니까 타인의 말을 타인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면 인간 사이에서도 화낼 일도 별로 생기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상대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공감하는 능력이 배우로서 중요한 덕목인 것 같아요.
배우님의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담기에 요즘 작품 속 중년 여성의 캐릭터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결국 문학이나 예술에는 사회가 반영되는 거잖아요. 분명 중년의 여성들이 누군가의 엄마일 수밖에 없었던 시절도 있었죠. 하지만 이제 제 역할 중에 전문직이나 의사, 교장선생님, 교수 등 다양해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조금씩 변화해 가고 있다는 거죠. 앞으로 더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하는 중년 여성들이 많아지면 점차 작품들도 그렇게 달라지겠죠.
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으로서 활동도 활발히 하고 계세요.
재단에서는 SOS 긴급 지원을 통해 병원비나 생활비 등 일시적인 도움을 드리고 있어요.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서 큰 도움은 못 드리지만, 저희가 먼저 찾아서 도움을 드리기도 해요. 연극인 중에 이런 제도를 몰라서 신청조차 못 하시는 분이 많으시거든요.

제가 이사장이 되고 나서 더 활성화한 건 연극인으로서 자긍심을 높이는 사업이에요. 연극인들은 가난해서 힘든 것보다 존중받지 못할 때 힘들어하거든요. 그래서 연극인 자녀 장학금을 ‘부모님이 연극에 공적이 많으셔서’라고 당당하게 주고, 연극상도 만들어서 수여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상은 주연만 받는데, 사실 연극은 함께하는 사람들이 무너지면 작품 자체가 망가져요. 그래서 조연상, 스태프 상도 만들었죠. 최근에 30년 연극을 한 어떤 배우가 상을 받고 “30년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는 거죠. 앞으로는 더 많은 분에게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낭독 공연을 통해 배우들과 연출가들의 만남을 이어주고, 연극인들이 지속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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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제3의 전성기가 기대됩니다.

축복의 기도를 들은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시작의 순간에 ‘꼭 잘 돼야지’하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상처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우리 극단 신조가 ‘변화하는 자유로움’이거든요. 저는 현재를 살고 있어요. 과거는 잘 기억도 안 나고 미래는 한 치 앞도 못 보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인생이 점 같다고 늘 생각해요. 오늘 하루 주어진 일 열심히 하고, 지금 만나는 사람한테 충실하고, 그렇게 점점이 이어져서 나라는 사람을 이루어왔던 것 같아요.

지금 20살짜리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대화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요. 나는 걔네 생각이 진짜로 궁금하고 걔네도 내 생각이 궁금하니까요. 가정폭력 얘기를 하는데 어떤 학생은 “매질이 필요해요. 전 맞아서 이 정도 사는 것 같아요.”라면서요. 그럴 때 “네 생각은 잘못됐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생각을 했어?”라고 물어봐요. 내가 나이가 많다고 더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걔가 가진 생각을 나는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알아야 하는 거죠. 계속 변화하고, 그게 자유로움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내가 처음에 여배우로 화려한 무대에 올라가는 걸 꿈꿨는데 그렇게 안 됐다면 얼마나 불행했겠어요. 근데 너무 단순하게 “우리끼리 연극 만들자”라고 시작했으니까 괜찮았던 거죠. 살면서 힘든 날도 많았고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일들도 있어요. 가족 간의 일이나 집안의 죽음 같은 건 제가 상황을 바꿀 수가 없잖아요. 그거는 그거대로 최선을 다하되, 그렇다고 그거에 짓눌려서 불행해지는 건 너무 가혹해요. 나는 또 나의 창문을 열고 다른 바람을 쐬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친한 후배랑 늘 얘기해요. “야, 인생이 맨날 축제였어.” 큰 욕심 안 내고 그냥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게 축복이라고요.

어떤 배우로 남고 싶으세요.
모든 연기자의 소망은 대사를 못 외우고 거동하지 못할 때까지 연기를 하는 것일 거예요. 역할이 주어지고 그 역할을 해내느라 머리를 싸매고 마음을 다지는 게 최고로 행복해요. 그래서 앞으로도 만날 역할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요즘 방송, 영화 상황이 안 좋잖아요. 영화는 특히 마음이 아파요. 젊은 친구들은 핸드폰이 더 편안하다고 하고, 큰 화면이 불편하다는 친구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야 할지 생각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작품을 하러 갈 수 있다는 게 감사해요.
좋은 역할이든 아니든,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서 그 역할을 살아있게 만들고 관객과 시청자들께 보여드리고 싶어요.

길에서 만난 분이 “연기 너무 잘하세요”라고 말해주실 때가 있어요. 배우에게 “연기 잘해요”라는 말은 적절하다는 뜻이거든요. 나서서 뭘 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적합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거죠. 오래도록 연기를 할 수 있어서 모든 분이 “저 배우는 저 역할을 또 잘하네”라고 말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럴 때 사람들 눈빛이 달라져요. 이름은 몰라도 “맞죠? 그 배우! 아, 연기 너무 잘하세요”라는 그 한마디가 우리 본분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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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님의 목소리와 눈빛에 가득 찬 사랑이 저에게까지 흘러오는 것 같아요”라는 말에 길해연 배우는 지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예전엔 꽤 염세적인 사람이었어요. 이상한 정의감에 사로잡혀 상대를 단죄하는 것이 옳다고 믿던 시절도 있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모든 게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삶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바뀌었고, 나이가 들면서 인생이 살아볼 만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이제 육신과 외모는 늙어가고 건강에 문제도 생기겠지만, 지금처럼 계속 일할 수 있다면 제 영혼은 더 성장할 거에요. 그리고 언젠가 삶을 마감하겠지만,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감사한 일이었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음절 하나, 한숨 하나에도 묵직한 밀도를 담아내며 마치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독백 같았다. 짧은 모노드라마를 눈앞에서 마주한 듯, “연극은 마법 같다”라는 그녀의 고백처럼 따스하고 긴 여운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