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칼럼
‘정년이’가 보여주는
과거와 현재의 매개
고사 위기의 여성국극 재조명한 ‘정년이’가 시사하는 것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KoBPRA WEBZINE Vol.89

우리에게 고전과 현대는 어떤 의미일까. 과거와 현재로 분리되는 어떤 것일까. 적어도 숱한 화제를 남기고 종영한 ‘정년이’에서의 의미는 그렇지 않다. 어떻게 과거가 현재와 매개되어 현재적 가치가 부여될 수 있는가를 이 작품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여성 국극의 불씨 지핀 ‘정년이’

그 위대한 시작은 서이레 작가가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연재한 웹툰 ‘정년이’로부터 시작됐다. 웹툰으로서는 색다른 장르인 시대극을 가져온 이 작품은 더더욱 놀랍게도 여성국극이라는 실제 창극단의 역사를 소재로 다뤘다. 전후의 상흔이 남아있던 1950년대, 하루하루가 생존이었던 서민들을 울리고 웃기며 삶의 숨통을 틔워준 여성국극단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당대에는 지금의 톱스타들 버금가는 인기를 구가했지만, TV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사라져가다 이제는 고사 직전에 몰린 여성국극이지만 이 웹툰은 빼어난 캐릭터와 극적 서사를 통해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드라마업계 역시 이 작품을 주목했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이지만 윤정년이라는 청춘과 여성국극단에서 경쟁하며 동반성장하는 동료들의 성장드라마가 지금의 대중정서에도 딱 어울리는 것이라 판단됐기 때문이다. 결국 드라마화된 작품은 매 회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인기리에 종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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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정년이> 포스터(좌). 네이버에서 2019년 4월부터 2022년 5월까지 연재되었다. ©네이버 웹툰
여성국극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일으켰던 드라마 <정년이> 포스터 ©tvN

중요한 건 이 작품이 이끌어낸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이다. 드라마는 이례적으로 작품 속 작품으로 ‘춘향전’, ‘자명고’, ‘바보와 공주’, ‘쌍탑전설’ 같은 국극을 재연했다. 우리 소리와 춤의 아름다움이 재연된 드라마를 통해 국극이 현재의 시청자들에게 전해졌고, 특히 극화된 인물들의 서사와 어우러지며 국극이 가진 매력 또한 극대화됐다. 동시에 ‘정년이’의 음악감독이자 ‘범 내려온다’로 잘 알려진 이날치 밴드의 베이시스트 장영규가, 박민희 연출감독, 조영숙 명인과 함께 세종문화회관에서 여성국극 ‘조 도깨미 영숙’을 무대에 올려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작품으로 여성국극 1세대인 90세의 조영숙 명인은 선화공주부터 철쇠까지 1인5역을 소화해내며 기립박수를 받았다. 나이 들어 등이 잔뜩 굽었지만, 타고난 목소리는 여전히 짱짱한 조영숙 명인은 그렇게 여성국극이 살아있다는 걸 온몸으로 알렸다.

‘정년이’가 지핀 여성국극의 불씨는 곳곳으로 펴져나갔다. 국립창극단은 지난해 창극 ‘정년이’를 선보였고, 국가유산진흥원은 여성국극 특별공연 ‘한국 최초 여성 오페라, 전설이 된 그녀들’을 연장 공연했다. 또 내년 1월에는 안산문화재단이 지원작으로 선정한 신작 여성국극 ‘벼개가 된 사나히’가 무대에 올려진다. 이 작품을 올리는 여성국극제작소는 고사 직전의 여성국극의 명맥을 이어온 곳으로 작년에는 ‘레전드 춘향전’을 올해는 ‘삼질이의 히어로’와 ‘화인뎐’을 공연했다. ‘화인뎐’은 ‘정년이’의 음악감독 장영규가 참여한 작품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의 매개로 가능한
성공적인 재해석

‘정년이’가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여성국극을 소재로 하면서도, 현재에 열광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던 건 드라마적 재해석 덕분이었다. 즉 ‘정년이’는 당대의 여성국극에 대한 대중적 인기와 그 하나하나의 무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현재의 K팝 아이돌의 성장 과정처럼 재해석한 면이 있다. 오디션을 치르고, 연습생 과정을 거치며 무대에 올라서도 주변인물 역할에서 조연, 주연으로 나가는 그 일련의 과정이 그렇다. 또 당대의 국극단원들에 대한 인기는 현재의 팬덤 문화의 효시를 보는 것만 같았다.

이처럼 성공적인 작품이란 과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걸 현재에 다시 숨쉴 수 있게 해주는 재해석일 수밖에 없다. 세종문화회관이 올린 ‘조 도깨비 영숙’이 호평을 받은 건, 여성국극 1세대인 조영숙 명인이 가진 국극 본연의 묘미와 더불어, 이를 현재적으로 재해석한 장영규, 박민희의 참신한 접근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과거와 현재의 매개를 통한 재해석은 최근 예술계 전반에서 활발해졌다.

예를 들어 지난 11월에 공연된 고선웅 연출의 ‘퉁소소리’는 조선시대의 고소설 ‘최척전’을 재해석한 연극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중국과 일본 나아가 베트남까지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만나게 되는 가족의 이야기를 세련된 스타일로 연출한 작품이다. 또 드라마 ‘옥씨부인전’은 백사 이항복이 사실을 바탕으로 쓴 소설 ‘유연전’을 현재적인 정서를 담은 사극으로 재해석했다. 이미 ‘범 내려온다’로 판소리가 얼마나 힙하게 재해석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이날치 밴드는 물론이고, 국악 오디션 프로그램 ‘풍류대장’을 통해 정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 해음 등등 국악 또한 현재적 재해석을 통해 지금의 대중들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어딘가 현재와는 유리된 것처럼 여겨지던 한국무용 또한 마찬가지의 변신을 보여주고 있는데, 최근 방영됐던 ‘스테이지 파이터’는 현대무용보다 더 힙하게 한국무용을 선보이는 최호종 같은 스타를 발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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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여성국극 1세대 조영숙 명인의 예술적 삶을 담은 <조 도깨비 영숙>이 무대에 올랐다. 아흔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조 명인의 뜨거운 연기가 끝난 후 오랫동안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세종문화회관


신구세대의 연결,
그 새로운 가능성

한때 국악은 전통의 고수에 천착함으로써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그건 새로운 매체의 등장과 함께 시대가 변화하고 있는 것에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생겨난 일로 ‘정년이’에도 이 사례가 등장한다. 국극의 스타였던 문옥경(정은채)이 TV의 등장에 따라 연기로 전향함으로써 국극 자체가 존폐 위기를 겪게 되는 상황이 그것이다. 또 윤정년(김태리)이 가수로 데뷔해 TV에 나오게 되는 에피소드에서도 이러한 시대의 변화가 담겨져 있는데, 이건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이다. 유랑극단의 형태로 전국을 돌며 공연을 하던 예인들은 TV의 등장과 함께 방송으로 전향하거나 혹은 조용히 사라져가는 갈림길을 겪지 않았던가.

국악이 최근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현재적 호흡에 맞는 재해석을 하려는 젊은 국악인들이 있어서지만 이들 뒤에는 그들에게 사사한 명인들 또한 존재했다. 예를 들어 국립창극단 소속으로 팬클럽까지 갖고 국악아이돌로 불리는 소리꾼 김준수의 뒤에는 박금희 명창 같은 존재가 있었고, 씽씽밴드로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킨 경기민요 소리꾼 이희문에게도 그의 어머니이자 명창인 고주랑 같은 명인이 있었다. 이들 명인들은 이제 전통의 고수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전통을 지키는 것 역시 현재와의 호흡을 통해 그 명맥이 이어질 수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이들은 공감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원로배우들과 젊은 배우들의 앙상블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건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들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 ‘대가족’의 이순재나 드라마 ‘돌풍’의 박근형 같은 배우들이 그렇다. 물론 과거에비해 가족드라마가 많이 사라지면서 이들 원로배우들이 설 자리가 전반적으로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개가 내는 소리를 알아듣는 노인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개소리’ 같은 드라마에 이순재를 원탑으로 세우는 등의 참신한 시도는 신구 세대의 매개가 가능한 시너지를 엿보게 해준다. 과거와 현재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고 또 그렇게 연결됨으로써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작품이든 장르든 혹은 그 영역에 종사하는 실연자들이든 더 많은 신구의 매개가 시도되기를 바라는 이유다.

columnWriter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각종 방송 활동, 강연 등을 통해 대중문화가 가진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알리고 있고, 백상예술대상, 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저서로 <드라마 속 대사 한 마디가 가슴을 후벼팔 때가 있다>,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