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칼럼
자극적인 맛?
이젠 순한 맛 콘텐츠가 필요해
OTT가 연 고자극 콘텐츠의 피로감, 디톡스 콘텐츠를 찾는 대중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KoBPRA WEBZINE vol.88

치열해진 경쟁에 OTT라는 새로운 영상 서비스 방식이 등장하면서 콘텐츠들은 자극적으로 변모했다. 이른바 도파민 콘텐츠 경쟁이 생겨난 것. 하지만 고자극 콘텐츠의 피로감은 정반대의 흐름 또한 만들었다. 이른바 순한 맛 콘텐츠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OTT가 연 도파민 콘텐츠 경쟁

2016년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했던 초창기, 이 새로운 OTT의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준 K콘텐츠들은 ‘미스터 션샤인(2018)’, ‘킹덤(2019)’ 그리고 ‘인간수업(2020)’이다. 이들 작품들은 규모 면에서나 소재와 표현에 있어서 기존 방송사들은 다루지 못했던 것들을 담고 있었다. ‘미스터 션샤인’은 무려 430억의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급 드라마로서 이제 OTT라는 새로운 동영상 서비스 방식으로 글로벌 콘텐츠의 장이 열린다는 걸 그 개화기의 풍경 속에 담아 넣었다. 그건 마치 K콘텐츠의 개화기가 도래했다는 은유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듬해 등장한 ‘킹덤’은 방송사들은 애초에 다룰 수 없었던 좀비 장르를 선보였다. 그것도 사극 버전이었다. 목이 날아가고 불에 타는 좀비들의 모습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다음해 등장한 ‘인간수업’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방송사가 내놨던 청소년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들이라면 대부분 학업 문제나 이성 간의 문제 같은 소재들을 다루었지만, ‘인간수업’은 청소년 성매매의 문제를 소재로 다뤘다. 방송사가 이른바 ‘공영성’과 ‘보편성’의 틀에서 다룰 수 없었던 소재나 표현들이 OTT에는 경쟁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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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미스터 션샤인> 포스터 © Netflix

‘약한 영웅’이나 ‘돼지의 왕’ 같은 학교폭력을 소재로 하는 청소년 주인공의 드라마들이 학원 액션물이라는 장르로 쏟아져 나왔고, 이 밖에도 ‘피라미드 게임’이나 ‘하이라키’ 같은 작품들은 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계급경쟁은 물론이고 마약을 소재로 다루기도 했다. ‘지금 우리 학교는’, ‘스위트홈’, ‘ 같은 역시 자극성이 높은 좀비나 크리처물 역시 계속 등장했다. OTT가 쏟아낸 자극에 시청자들이 익숙해지자, 기존 지상파, 케이블, 종편 채널도 이 도파민 경쟁에 뛰어들었다. 개연성은 없지만 자극에 자극을 더하는 ‘펜트하우스’ 같은 막장 드라마가 등장했고, 그간 방송사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았던 19금 콘텐츠들도 등장했다. ‘부부의 세계’나 ‘SKY캐슬’ 같은 작품들은 19금을 내걸고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예능 프로그램도 예외는 아니었다. ‘솔로지옥’ 같은 고강도의 연애 리얼리티가 등장하면서 OTT들은 자극적인 연애 리얼리티의 경쟁지대가 되었다. 이제 연애 리얼리티의 카메라는 침대 안까지 들어갔고 성소수자들을 대상으로 하거나, 양성애자가 등장하는 연애 리얼리티까지 나왔다. 이러한 리얼리티쇼의 세계가 열리자, 기존 레거시 미디어들도 이 세계로 뛰어들었다. ‘오은영 리포트-결혼지옥’ 같은 프로그램은 전문가의 솔루션 프로그램이라는 틀을 썼지만 갈수록 자극적인 부부들의 갈등 양상을 관찰카메라에 담아 보여줬다.

도파민 과잉이 불러온 순한 맛에 대한 갈증

OTT가 열고 기성 방송사들이 따라가는 도파민 경쟁이 불러온 건 극도의 피로감이다. 당장의 자극이 시선을 잡아 끌긴 하지만 갈수록 자극에는 무뎌지고 더 큰 자극을 원하다 보니 콘텐츠를 콘텐츠로 소비하기가 어려워진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른바 ‘고구마-사이다’라는 이분법적인 평가가 일상적으로 나오게 된 건 그래서다. 조금만 답답하거나 지지부진해지면 고구마 콘텐츠라고 말하고 개연성은 없어도 당장의 시원함을 보여주면 사이다 콘텐츠라 평가하는 것. 하지만 어찌 콘텐츠의 평가가 이리도 단순할 수 있을까.

도파민 경쟁이 불러온 지끈지끈해진 머리를 이제는 좀 쉬고 싶고, 좀더 본질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순한 맛’ 콘텐츠들이 주목받게 된 것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ENA와 넷플릭스에서 동시에 방영되었는데 의외로 이 순한 맛이 넷플릭스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넷플릭스를 통해 이 순하지만 감동적인 드라마를 접한 이들은 점점 ENA 본방송을 기다리다 보게 됐고 따라서 시청률 또한 급상승했다. 이 드라마는 ENA 사상 최고 시청률인 17.5%(닐슨 코리아)를 기록했다. 역시 넷플릭스에 방영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또한 잔잔한 힐링 드라마로 좋은 반응을 얻으며 시청자들의 입소문을 탔다. 물론 이 와중에도 넷플릭스는 ‘경성크리처’ 같은 고자극 콘텐츠를 내놓았지만 이제 국내 시청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해졌다. 반면 케이블과 종편에서 방영된 ‘닥터 차정숙’, ‘나쁜 엄마’, ‘웰컴 투 삼달리’, ‘닥터 슬럼프’ 같은 힐링 드라마들이 주목받았고, ‘눈물의 여왕’, ‘선재 업고 튀어’, ‘졸업’ 같은 순한 맛 멜로드라마들이 연달아 성공을 거뒀다. 넷플릭스는 자극성 높은 오리지널 콘텐츠보다 순한 맛인 기성 방송사에서 방영권만 가져온 콘텐츠들이 더 주목받는 상황을 보여줬다.

예능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극적인 오디션 프로그램들 대신 ‘싱어게인’ 같은 순하지만 감동을 주는 오디션이 큰 성공을 거뒀고, 자극으로 치닫던 연애 리얼리티의 양상 또한 ‘연애남매’ 같은 가족 콘셉트가 결합한 훈훈한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언니네 산지직송’이나 ‘서진이네2’처럼 그다지 큰 자극이 없이도 멍하니 불멍, 물멍 하듯 콘텐츠멍하게 해주는 예능 프로그램들도 좋은 성과들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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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 업고 튀어> 포스터 © tvN


자극과 휴식, 콘텐츠 소비의 순환

매운 음식을 먹고 나면 순한 음식이 당기듯이, 자극은 휴식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자극적인 콘텐츠들을 처음 꺼내놓았을 때 우리네 시청자들은 반색했다. 그 얼얼한 맛에 기존 콘텐츠들이 밍밍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자극에 자극이 계속 이어지면서 더 이상 그 자극조차 둔감해지게 되자 이제 시청자들은 정반대로 본래 익숙했던 순한 콘텐츠들을 찾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소소하지만, 확실한 재미와 편안함을 주는 로맨틱 코미디류의 작품들이 tvN, JTBC를 통해 소개되면서 괜찮은 반응을 얻고 있는 건 그래서다.

물론 여기에는 OTT로 인해 급상승한 제작비의 부담 때문에 콘텐츠 제작 투자 자체가 줄어든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 이제 그런 고자극 블록버스터 콘텐츠는 1년에 몇 개 정도 그것도 투자 여력이 있는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 같은 글로벌 OTT에서나 가능한 일이 됐다. 그러니 기성 방송사들은 가성비가 나오는 콘텐츠에 투자할 수밖에 없다. 그건 바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다. 물론 여기에도 시대 변화에 맞게 회귀물 같은 판타지를 섞는 운용의 묘가 들어가면서 이들 로맨틱 코미디는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까지 반향을 일으키는 성과를 내고 있다.

물론 이 순한 맛 콘텐츠의 약진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거라고 보긴 어렵다. 다만 자극적인 콘텐츠들로만 가득 채워졌던 상황이 이제는 순한 맛과 적절히 균형을 이뤄가며 콘텐츠 식단을 다채롭게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게다. 우리는 자극을 원하지만 동시에 휴식도 원한다. 그 욕구의 순환은 콘텐츠 소비의 순환 또한 만드는 요인으로 앞으로 이 순환은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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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각종 방송 활동, 강연 등을 통해 대중문화가 가진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알리고 있고, 백상예술대상, 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저서로 <드라마 속 대사 한 마디가 가슴을 후벼팔 때가 있다>,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