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저작물의 저작자와 실연자(이하 창작자로 통칭)에게 정당한 보상을 보장하는 입법
논의의 주된 쟁점 중 하나는
누구에게 보상을 청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저작권법상 권리를 양도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영상제작자에게 청구하는
것이 법리적으로 타당하다는 견해와, 실질적으로 문화산업의 헤게모니를 점하고 막대한 부를
누리는 OTT플랫폼사업자가 보상하여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양립한다.
우리는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이 글은 본격적인 현실의 논쟁에서 잠시 한발
물러서 원론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먼저 창작에 대한 보상의 역사, 즉
예술후원의 구조를 통시적으로 조망하고, 그것을 관통하는 역사적 법칙이 오늘날의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함의를 지니는지 살펴본다.
창작자에 대한 보상의 역사
문화산업에서 문화콘텐츠를 경험하는데 가격을 매기고 그 가격의 일부를 콘텐츠 창작자에게
귀속하는 방식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문화산업과 저작권 제도가 사회의 일반으로 자리 잡은
까닭이다. 문화산업의 가치사슬은 창작자에서 사업자로 또 소비자로 이어지고, 부가가치는
그 역순으로 저작권 제도에 의하여 발생하고 분배된다. 우리 방송실연자의 저작인접권
사용료 또한 그와 같은 맥락에 있다. 방송실연자는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출연한
프로그램이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가 저작인접권 사용료로 방송실연자에게 지급되는 식이다.
이와 같은 방식이 인류의 역사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저작권법 교과서의
첫머리를 들추어보면 ‘근대적인 저작권 제도가 사회에 정착하기 전 예술가의 생계는
후원제도(patronage)에 의하여 유지되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예술의 후원이란 부(富)나
권력을 소유한 자가 예술가에게 이익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고전적인 후원제도의 특징은 작품의 대가로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와
후원자의 관계에 의하여 이익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인류는 이러한 고전적인 방식의 후원을 통하여 예술의 역사를 이루었다.
예술후원은 시대별로 당대의 사회구조를 반영하여 여러 양상으로 나타났다. 신정환·이영림은
예술후원의 거시적인 흐름이 ‘왕실이나 교회의 공적 후원’에서 ‘귀족과 부르주아의 사적
후원’으로, 그리고 다시 ‘시민 대중의 공공 후원’으로 변화하였다고 설명한다. 요컨대 당대
헤게모니를 점유한 권력이 예술후원의 주체가 되었던 것이다. 그중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만한 시기는 18세기 이후 사적 후원이 공공 후원으로 변모하는 지점이다.
근대 이전 후원의 주체는 왕실이나 교회, 귀족과 부르주아와 같은 사회의 극소수를 이루는
특권층이었다. 예술가는 생계를 위하여 극소수의 특권층에게 영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으며, 그 결과 근대 이전 대부분의 예술작품은 소수 후원자의 선호에 형식에 부응하는
형태로 남았다. 가톨릭 교회의 요구에 부합한 중세의 예술가, 평생을 왕실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바친 궁정화가 등은 여기에 잘 부합하는 예시일 것이다. 근대 이후에도
독재자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근현대 과도기의 예술가,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한
소련의 예술가 등 특권층의 후원에 의한 창작은 그들의 취향을 지향하기 마련이었다.
18세기에 이르러 그와 같은 고전적인 예술후원의 구조는 서서히 종말을 맞이하였다.
18세기는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 등 민중의 힘이 분출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여 예술작품은 일종의 상품이
되고, 예술가는 창작의 결과물을 시장에 내놓음으로써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예술이 소수의 후원자에게서 해방되어 다양성을 지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수의
취향에 고정된 양식에서 해방된 문화예술은 다양성을 지향하여 폭발적으로 팽창하였다.
이처럼 예술후원의 주체는 시대의 변화를 거치며 변화하였다. 그러나 그 변화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었다.
당대 사회의 헤게모니를 차지한 자가 언제나 예술후원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종교-왕실-귀족-부르주아-시민 대중으로 이어진 후원 주체의 흐름은 역사상 권력의 계보와
일치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예술후원은 대중의 구매가 될 것이고, 이를 감안하면
저작권 제도를 공공 후원의 일종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문제:
영상창작자의 정당한 보상과 관련하여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누가 창작자에게 보상을 지급할 것인가?
예술후원의 역사를 미루어 보건대, 해답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대중이다.
현대의 시민 대중은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이자 문화상품의 향유자이다. 대중은 자신의 기호에
맞는 문화상품을 향유하고, 그 대가를 창작자에게 지급한다. 이것이 ‘헤게모니를 차지한
자가 예술후원의 주체가 된다’는 예술후원의 역사적 법칙에 부응하는 현대 문화산업의
토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리를 우리 영상창작자가 마주하는 현실의 문제에 접목한다면, 우리가 정당한 보상을
청구할 대상은 영상제작자와 OTT플랫폼사업자 중 누구라도 무방할 것이다. 보상의 원천은
대중이기 때문이다. 보상을 청구할 상대방은 누가 되건 발생한 부가가치를 전달하는 창구에
불과하다.
문화산업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대중으로부터 비롯된 보상은 청구 대상이 누구인지와
무관하게 그 일부가 문화상품의 유통망을 거슬러 창작자에게 주어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부가가치를 분배하는 문제에 있어서 문화산업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우리 문화산업에는 저작물이 얼마나 유통되는지와 무관하게 저작물
이용의 대가를 미리 일괄하여 지급하는, 이른바 ‘매절계약’이 횡행하고 있다. 나아가 소정의
일시금으로 저작재산권 일체의 양도와 저작인격권의 불행사를 요구하는 불공정 계약도
만연하다.
이러한 계약은 대중으로부터 비롯된 부가가치를 적정하게 창작자에게 전달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병리적 현상이다.
여러 창작자단체가 OTT플랫폼사업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직접 청구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배경 또한 여기에 있다. 글로벌OTT플랫폼은 영상제작자에게 OTT오리지널콘텐츠의
제작비를 전액 투자하는 조건으로 권리 일체를 양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즉 영상제작자
또한 대중으로부터 비롯되는 부가가치의 분배과정에서 소외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창작자는 유사한 처지에 놓인 영상제작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청구하는 것이 옳은 방향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 문제는 창작자와 국내 영상제작자가 뜻을 모아 함께
대응하여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끝으로
지난 7월 방송작가, 영화감독, 시나리오작가, 독립PD, 그리고 우리 방송실연자가 한데 모여
창작자연대를 발족하였다. 목표는 영상저작물 창작자가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저작권법을 개정하는 것이다. 그간 각 단체가 이 문제를 다루었던 방식은 조금씩 달랐으나
정당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필요하다는 공동의 인식 아래, 창작자연대는 보상을 청구할
대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쟁점에 대한 의견을 조율해나가고 있다. 다양한 직종의 창작자가
뜻을 함께한 만큼,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