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 30분 전, 함은정은 스튜디오에 먼저 도착했다. 빼곡한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조금
숨을 돌리고 올만도 한데 부지런한 성격인 듯했다. 사진작가가 카메라 위치를 바꾸느라 잠시
쉬고 있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인터뷰는 먼저 시작해도 좋다”며 말문을 열었다. 지친 기색이
조금도 없는 얼굴, 인터뷰가 첫 스케줄인 것처럼 함은정의 표정은 가볍고 상쾌했다.
촬영이든 인터뷰든 첫 만남에서는 약간의 긴장감이 감돈다. 외향형이든 내향형이든 상대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솔직하고
정확한 표현을 편안하게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함은정은 후자인 듯했다. 인터뷰어
입장에서는 매우 고마운 캐릭터. 어떤 질문이든 편견 없이 듣겠구나, 확신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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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 3일은 세트 촬영을 하고 금토일은 야외 촬영이 있어요. 목요일 하루만 쉬고
있는데 그때도 일정이 있으면 못 쉬어요. 그런데 간혹 일주일에 사흘 정도를 쉴 때도 있어서
엄청 힘든 일정은 아니에요. 드라마 회차가 28회가 늘었거든요. 저는 일일드라마 현장을
너무 좋아해요.
올해 3월 첫 방송을 시작한 KBS1 일일드라마 <수지맞은 우리>. 100회로 막을 내릴
예정이었는데 뜨거운 반응 덕분에 128회로 연장됐다. 주연을 맡은 건 세 번째. <사랑의
꽈배기>, <별별 며느리>로도 시청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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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드라마를 워낙 좋아해요. 촬영 현장도 좋아하고요. 왜 좋은가 싶으면 전 연령대의
배우들을 만날 수 있어서인 것 같아요. 미니 드라마나 OTT 시리즈는 촬영 기간이 짧아서
선배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이 없잖아요. 그런데 일일드라마는 6개월 이상 정말
가족처럼 얼굴을 보니까 동고동락하는 느낌도 들어서 너무 좋아요. 촬영이 끝나고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선배님들이 많아요.
드라마 러브콜이 왔을 때, 기쁜 한편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기라성 같은 선배 배우들과
함께 첫 번째 롤을 잘 맡을 수 있을까, 호흡이 긴 드라마를 책임감 있게 잘 끌고 갈 수
있을까. 아역배우로 데뷔해 ‘티아라’ 활동으로 정점을 찍고 다시 연기를 시작한 함은정은 매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새로운 기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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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가 점점 좋아져요. 편안해지는 건 아닌 것 같고요. 조금 내려놓게 된다고 할까요?
어떤 상황이든 모든 걸 좀 내려놓고 받아들이게 되는 면이 생겼어요. 또 반대로 알기 때문에
깐깐해지고 좀 더 파고들게 되는 지점도 생기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완성도에 관한 건 점점 타협이 안 돼요. 이 시간에 더 에너지를 내면 다른
결과물을 낼 수 있다는 걸 아니까, 100%가 아닌 120%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약간
집착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해봤는데 안 됐을 때는 겸허히 받아들여요. 제가
노력해도 안 되는 상황, 환경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을 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언제나 빛날 것 같은 배우도 마찬가지다.
배우도 사람이니까, 누군가로부터 진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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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지날 때 무장 해제된 모습으로 저에게 다가오는 분들이 계세요. 제가 다시
아이돌이 된 느낌이 들 만큼 너무 반겨주시고 사랑해 주세요.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같은
인사도 있지만 ‘그런데 수지는 왜 그러는 거래요?’, ‘나 정말 재밌게 보고 있잖아’라고 정말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바로 제 이웃집에 사시는 분들처럼 먼저
다가와서 말씀해 주시면 참 감사해요. 진짜 사랑을 받는 기분이 들거든요. 삶의 희로애락을
다 겪으신 분들로부터 인정받을 때, 그게 너무 귀해요. 인기의 척도에 따라 열광을 받는 게
아니니까요.
자신감에서 따라오는
존중
일일드라마를 중년들만 본다는 것은 오해다. 저녁 시간에 엄마가 보길래 같이 봤다는 귀여운
초등학생 시청자부터, 드라마를 보다가 ‘티아라’의 존재를 알게 됐다는 중고등학생까지.
거리에서 생생한 리뷰를 들을 때마다 배우로서의 책임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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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드라마를 찍으면서 처음으로 시청률을 찾아보고 있어요. 예전에는 사실 시청률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현장에서 최선을 다했으니까 따라오는 결과는 내
손을 떠났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분석하게 돼요. 어떤 장면이 나왔을 때
시청자분들이 더 반응하는지를 찾아보게 돼요.
함은정은 낙천주의자다. 현실의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힘든 일이 생겨도 문젯거리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으려고 한다. “조금 이상적으로 생각하면서 판타지를 갖고 사는 게
배우 일을 하기에 더 좋다”는 것이 함은정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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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라 활동을 활발하게 한 후에 연기자가 됐는데, 시간이 너무 다르게 흘러가는
거예요. 이렇게 쉬어도 되나?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고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연기를
하면서 다시 힘을 얻었어요. 연기 선생님께 수업을 받았는데 어느 날 제게 물으시더라고요.
‘네가 잘하는 거를 발전시키고 싶니? 아니면 못하는 걸 발전시키고 싶니?’ 그땐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잘 모르겠다고 답을 드리니 스스로 어떤 걸 좋아하는지 찾아보라고
하셨어요. 내가 산미가 있는 커피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일상의 사소한 것부터
시작했죠.
그전까지는 빠른 출력이 미덕이었다. 취향의 존재를 따지지 않고 일단 받아들이거나 어떤
색깔을 빨리 입고 출력해 내는 게 아이돌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연기를 한 후 비로소 내
취향을 알게 됐다. 더 확실한 느낌으로 작품에 임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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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없을 때의 일상도 중요해요. 모든 시간과 경험들이 축적돼 분출되는 거니까요.
남들이 볼 때는 그냥 노는 것으로 보일지언정 ‘나는 오늘 이렇게 놀았어’라고 생각하면,
다른 경험이 돼요. ‘오늘은 이런 기분이었고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루를 정리하면 흥청망청
시간을 보낸 것과는 완전히 달라요. 이제 모든 시간을 귀중하게 잘 보내는 법을 터득한 것
같아요.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을까. 함은정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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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조언할 수 있는 입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캐스팅이 되었다면 조금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현장에서 권리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신인이어도
한 작품 안에서는 동료인 거잖아요. 선배님들을 존중하는 자세, 어른을 대하는 예의는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캐스팅이 되었다면 우리는 모두 동등한 동료라는 의식을 갖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면 좋겠어요. 그래야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어요. 겸손이 미덕일
때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요구할 것들은 또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올여름은 하루하루가 폭염의 연속이었다. 전 세계가 직면한 기후 위기를 한순간에 해결할
수는 없지만 가장 좋은 컨디션으로 촬영할 수 있도록 현장을 만들어가는 일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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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은 그래도 조금 나아요. 에어컨이 없는 장소에서 촬영할 때는 누군가 선풍기를
가져다주니까요. 하지만 스태프들은 계속 무거운 장비를 들고 밖에 나와 있잖아요. 에어컨이
없는 장소에서 촬영할 때는 모두가 곤혹스럽죠. 주 52시간을 준수하면서 촬영하거나 어린이
배우 촬영 규약을 사전에 공지하는 등 10년 전과 비교하면 정말 많이 좋아지긴 했어요. 제가
아역 배우를 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차이가 정말 커요. 그때는 촬영이 안 끝나면 저도 같이
밤을 샜거든요. 요즘은 시간 때문에 아역 배우들 촬영을 선배님들보다 먼저 찍어요.
무대의 경계가 사라진 시대,
유연하게 적응해야
요즘 지상파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두 자릿수가 넘으면 출연진들이 먼저 나서서 챌린지를
한다. 유튜브, OTT 등을 통해 편집본, 재방송을 보는 경우가 훨씬 많아서 시청률이 10%를
넘으면 소위 대박 프로그램이 된다. 연예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름을 건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팬들과 활발한 소통을 이어간다. 제작진이 러브콜을 보내주기만을 기다리는 스타는
이제는 없다. 꾸준히 얼굴을 보여주고 개성을 드러내야 기회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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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의 경계가 확실히 없어졌어요. 그야말로 대통합의 시대인 것 같아요.
플레이어로서는 크게 다른 게 없지만, 채널마다 색깔은 분명히 달라요. 저는 유튜브도 하고
SNS로도 사람들을 만나는데요. 지상파에 나올 때 더 책임감을 느껴요. 아무래도 공적인
느낌이 크니까요.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되는 건 지상파가 유입이 확실히 더 크죠. SNS로
대중들을 만날 때는 매체에 맞는 색깔을 보여주려고 해요. 좀 편안한 느낌으로 촬영할 때가
많아요.
유튜브나 SNS는 대중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춰 채널이나
프로그램의 방향성이 바뀌기도 한다. 함은정은 이런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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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좀 당연한 것 같아요. 연예인들도 먼저 다가가야 하는 것 같고요. 요즘엔
‘인플루언서’, ‘크리에이터’라는 표현을 많이 쓰잖아요. 최근에 넷플릭스 시리즈 <더
인플루언서>를 봤는데요. 장근석 오빠를 배우가 아닌 ‘연예인’으로 직업을 소개해서
놀랐어요. 경계가 많이 사라졌지만, 지상파에서 만들어진 인지도나 영향력이 다른 플랫폼에
갔을 때 똑같은 파급력을 발휘하진 않는 것 같아요. 유튜브에서 크리에이터로 유명한 사람이
지상파로 왔을 때도 마찬가지고요. 플랫폼마다 플레이어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다른 것
같아요.
과거에는 사업을 하는 연예인들을 특별하게 바라봤지만, 요즘엔 매우 흔하다. 광고,
홍보라는 해시태그를 걸고 SNS에 사진을 올리고,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론칭하는
경우도 많다. 함은정은 피부에 관심이 많아 화장품을 주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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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양하게 관심이 많은 편이에요. 에세이 쓰는 걸 좋아해서 언젠가는 책을 한 번
내보고도 싶고, 사극도 좋아해 또 한 번 도전해 보고 싶기도 하고요. 제가 만든 브랜드를 잘
소개하는 일도 즐거워요. 동남아의 경우 자기 사업을 안 하는 연예인들이 없을 정도예요.
유튜브도 열심히 하고 라이브 커머스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데요. 어떻게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작품을 고를 때 끌리면 하듯이, 일단 끌리면 도전해 봐요. 요즘은
연예인들이 추천한다고 바로 지갑을 열지 않아요. 우리도 누가 모델이라고 바로 사진
않잖아요. 다양한 경험, 시도가 주는 에너지가 제겐 커요. 시장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 지금 저의 몫이 아닐까 싶어요.
함은정은 스스로를 두고 ‘일하면서 에너지를 얻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때로 긴 휴식
시간이 찾아올 때도 있지만, 이 또한 성장의 기회로 여긴다. 긍정, 낙천, 낙관을 넘어
함은정에게는 현명함이 보였다.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흔들리지 않고 주어진 일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 시대가 바뀌어도 중심을 꼿꼿하게 지키며 자신의 색깔을
만들어갈 배우, 함은정의 얼굴이다.
엄지혜
@koejejej
인터뷰어와 작가로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쓴다.
『태도의 말들』,『까다롭게 좋아하는 사람』등을 썼다.